6·10만세운동의 주역
6·10만세운동을 움직인 사람들
1.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 고려공산청년회)
1926년 4월 25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승하하였습니다. 그러자 5월 1일 메이데이 대중시위를 준비하고 있던 조선공산당은 순종의 인산일인 6월 10일에 시위를 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습니다. 마치 7년 전인 1919년에 고종의 승하를 계기로 3·1운동이 일어났던 것과 매우 유사한 상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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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6·10만세운동을 최초로 구상한 것은 신의주 사건 이후 일제의 체포령을 피해 상하이에 망명해 있던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였습니다. 그리고 임시상해부의 김단야는 국내에 있는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 겸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 권오설과 5월 1일 중국 안둥(현재 단둥)에서 만나 이를 합의하였습니다.
권오설을 통해 이 사실을 전달 받은 조선공산당 지도부는 논의 끝에 고려공산청년회의 주도하에 시위를 준비하기로 결정하였고, 고려공청 간부 3인(권오설, 박민영, 이지탁)으로 구성된 6·10투쟁특별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권오설이 이끄는 특별위원회는 천도교 구파로 대표되는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연대하는 한편,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조선노농총동맹의 세력을 동원, 지도하며 시위를 준비했습니다. 권오설 본인이 직접 격고문과 4종의 전단의 문구를 작성하였으며, 천도교의 박래원을 통해 인쇄, 배포를 준비시켰습니다.
한편 임시상해부는 국내의 6·10만세운동을 적극 지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권오설과는 별도로 격문을 작성 인쇄하여 국내로 반입시키고, 6·10투쟁에 필요한 경비를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측과 적극적으로 연대하였습니다. 당시 임시정부는 수반인 국무령이 공석인 상황에서 임시의정원 의장 최창식이 국무령 대리를 맡고 있었는데 최창식은 임시상해부의 6·10만세운동 계획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습니다. 그리하여 최창식은 자신이 경영하는 삼일인쇄소에서 임시상해부가 작성한 격문을 인쇄했습니다. 또한 임시상해부는 임시정부 측 인사들과의 교감하에 임시정부 산하 비밀결사단체인 병인의용대를 국내에 잠입시켜 6.10만세운동에 발맞춰 의열투쟁을 벌이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2. 천도교 구파
권오설이 추진한 천도교 측과의 연대는 박래원이라는 인물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박래원은 천도교 교주 박인호의 7촌 조카이자 박인호의 양자 박래홍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최린으로 대표되는 천도교 신파가 자치론을 내세우며 일제에 타협하는 태도를 보이자 박래원은 이에 강하게 반발하여 1926년 4월 박래홍과 함께 천도교청년동맹 창립 주역으로 활동하는 등 천도교 구파의 제3세대 핵심 인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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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박래원은 천도교 인사일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인쇄직공으로 일하며 사회주의를 접한 이래 경성노동연맹, 신흥청년동맹, 화요회, 불꽃사, 무산자동맹 등 각종 노동단체, 청년단체, 사상단체에 가입하여 활발한 활동을 벌였습니다. 또한 1925년에는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고 조선노농총동맹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26년에는 조선공산당 경성부 언론 야체이카의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활동 속에서 권오설과는 오랜 동지적 관계를 맺어왔던 인물입니다.
5월 초순 권오설은 박래원에게 6·10만세운동의 계획을 말하고 격문 인쇄 및 지방 배포의 임무를 부탁하였습니다. 박래원은 이를 교주 박인호를 비롯하여 권동진, 이종린, 박래홍 등 천도교 구파의 핵심 인사들에게 알린 후 이들로부터 흔쾌한 승낙을 받아냈습니다. 천도교 중앙총부는 비록 스스로 전면에 나서서 6·10만세운동에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박래원의 활동을 교단 차원에서 비밀리에 적극적으로 후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박래홍은 권오설로부터 넘겨 받은 격고문과 전단을 본격적으로 인쇄하고 배포하는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격고문과 전단 인쇄에는 손재기, 백명천, 양재식 등 천도교 인물들과 민창식, 이용재 등 인쇄직공조합원들이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박래원, 민창식, 이용재, 양재식은 인쇄한 격고문과 전단을 『개벽』, 『신민』, 『신여성』 등의 잡지에 조금씩 넣어 전국의 지방 거점 도시에 있는 조선일보 지사, 개벽사 지사, 소비자조합, 천도교교구, 기타 청년단체 등에 발송하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서울에서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통해 격고문과 전단을 배포하기로 하고 준비를 마쳤습니다.
또한 박래원은 이상우 등 천도교의 다른 계파인 혁신세력 측 인사들과도 연대를 모색했습니다. 그리하여 신파를 제외한 모든 천도교 지방 조직을 활용하여 만세 시위를 벌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3.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이른바 '사직동계')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기본적으로 사회과학, 즉 사회주의를 연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고등보통학교, 전문학교, 대학교 학생들의 연합학술단체였습니다. 그리고 주요 간부를 비롯한 일부 회원들이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청 소속으로서 조선공산당과 연계되어 지원, 지도를 받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연구회 전체가 조선공산당에 소속된 산하 단체였던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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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의 승하 소식을 접한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내에서는 3·1운동과 같은 시위를 일으켜야 하는 것인 아닌가 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구체적 계획을 세우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6·10투쟁특별위원회를 조직한 권오설은 학생들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해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동원, 지도하여 연대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6·10투쟁특별위원회와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연결하는 역할은 바로 조선공산당원이자 고려공청원이자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간부로 활동하고 있는 당내 학생 야체이카 5인 중 이병립과 권오상이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5월 3일 권오설은 이병립에게 6·10만세운동의 계획과 지침을 알리는 한편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임무와 역할을 전달하였습니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임무는 각급 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인산 당일 가두행렬에서 만세를 선창하고 격문을 살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병립은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간부들과 비밀리에 이러한 계획에 따라 논의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5월 20일에는 각급 학교 학생 대표 40여 명이 모임을 가지고, 투쟁 방법 및 자금 조달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협의하였는데, 준비 책임자로서 연희전문학교의 이병립과 박하균, 경성제국대학교의 이천진, 중앙고등보통학교의 이선호, YMCA의 박두종 5명이 선임되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간부였습니다.
그런데 6월 4일 이후 일제 경찰에 의해 시위에 필요한 격문과 전단이 모두 압수되고 천도교와 조선공산당 관련자들이 체포됨으로써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독자적으로 시위 준비를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태극기 200장,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 30장을 제작하고 이병립이 작성한 격문을 1만여 매를 인쇄하여 각급 학교 학생들에게 배포하여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6월 10일 순종의 상여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나누어 배치하여 있다가 격문을 뿌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침으로써 지도부의 체포로 인해 좌초될 뻔했던 6·10만세운동을 실행에 옮기는 데 성공했습니다.
4. 독자적 학생들의 모임 (이른바 '통동계')
한편, 6·10만세운동에 참여한 학생들 중에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는 별도로 독자적으로 움직인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중동학교의 황정환, 김재문, 곽대형, 그리고 중앙고등보통학교의 박용규, 이동환 5명이었습니다. 이 중 박용규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기는 하지만 비중 있게 오래 활동하지는 않았으며,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가 주도하는 6·10만세운동 계획에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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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5명의 학생은 5월 16일에 모여서 6월 10일에 제2의 3·1운동 같은 시위를 벌이기로 합의하고 각급 학교 학생들을 포섭하기로 결의했습니다. 또한 5월 26일부터 31일까지 공동으로 격문을 작성하고 5,000여 매를 인쇄하였습니다. 6월 8일과 9일에는 시내 각 학교와 전국 주요 지방 학교에 격문을 발송하여 인산 당일의 거사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독자적 학생들의 모임은 거사에 참여할 학생 동지들을 포섭해가는 과정에서 서로의 존재와 계획을 알게 되었고, 일정한 연대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연합하지는 않고 서로 긴밀히 연락하며 연대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그리하여 5명을 주축으로 모인 학생들은 6월 10일 당일 순종의 상여가 동대문 밖 동묘를 지날 때 격문 약 2,000장을 뿌리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일제와 온 민중들에게 알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