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공산당과 민족협동전선
흔히 공산주의 운동이라고 하면 오직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공산주의 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는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의 최우선 목표는 단연코 독립이었습니다. 이는 세계 다른 지역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의 대다수가 이념이나 계급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공산주의를 받아들였다고 하는 역사적 특수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당시 한국의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은 넓은 의미에서 볼 때 태생적으로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흔히 공산주의라고 하면 매우 급진적이고, 교조적이며, 배타적이고, 분열주의적인 경향을 가진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회주의자들은 독립운동을 할 때도, 민족주의자들을 배척하고 독자적으로 자신들만의 급진적인 방식으로 실행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 당시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은 독립을 위해서라면 민족주의자들과도 얼마든지 연합하려는 열린 자세를 취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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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공산주의가 수용된 직후인 1920년대 초반까지는 기존의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의 오류와 한계를 날카롭게 비판하며 대립 구도를 형성하고 독자적인 활동을 추구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무렵부터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적극적으로 민족주의 세력과의 연대, 즉 민족협동전선을 추진해 나갔습니다. 다만 친일파로 변절한 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까지 연대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아니었고, 오직 일제에 맞서 싸우려는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의 연대만을 추진하였습니다.
그 배경을 살펴보면 우선 국제적으로는 코민테른의 반제국주의 민족통일전선 기치하에 레닌과 쑨원(孫文)이 협력하여 1924년 중국에서 제1차 국공합작이 성립됨으로써 중국 민중들 사이에서 국민혁명의 열기가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국제사회의 좌우합작 분위기는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또한 국내적으로는 3·1운동 이후 일제가 겉으로는 민중의 불만을 잠재우고 회유하기 위해 부분적 자유를 허용하는 소위 ‘문화통치’를 표방하는 한편, 뒤로는 독립운동 세력의 일부를 회유, 포섭하여 친일파로 육성하고, 항일세력을 더욱 가혹하게 탄압하는 ‘민족분열정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일제와 협력하여 변절한 사람들이 바로 이광수, 최남선, 최린, 김성수 등 3·1운동의 지도자를 포함한 일부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민족개조론, 실력양성론(민립대학설립운동, 물산장려운동), 자치론(참정권 운동) 등을 주장하며 민중들로 하여금 독립을 포기하고 일제 통치에 순응하도록 유도하는 등 '현실주의'라는 명분으로 포장된 교묘한 말과 논리로 혹세무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일제는 조선인 대지주와 대자본가의 이권을 확대하여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이들과 함께 소작농, 노동자를 더욱 착취함으로써 계급적으로도 민족을 분열시키는 한편,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기를 느낀 독립운동 세력, 즉 사회주의 계열과 변절하지 않은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은 일제의 분열 책동과 친일파(타협적 민족주의 계열, 친일 대지주 및 대자본가)의 민족 반역 행태에 맞서 단결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사회주의 계열은 1925년 4월에 공식 정당인 조선공산당을 창당하였으며, 1926년에 코민테른으로부터 승인을 받았습니다. 그동안은 좌우합작을 하고 싶어도 좌파의 구심점이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좌우합작을 실행할 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조선공산당이라는 좌파의 구심점이 생겼기 때문에 이를 중심으로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민족협동전선을 추진할 토대가 마련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1925년 11월 이른바 ‘신의주 사건’으로 당 지도부가 대부분 체포됨으로써 조선공산당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달영을 책임비서로 하여 새롭게 구성된 제2차 조선공산당은 당을 정비함과 동시에 본격적으로 민족협동전선을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1926년 3월 강달영은 민족주의의 대표 격인 천도교 인사들과 만나 연대를 모색하였으며, 민족통일전선체로서 국민당을 창당하는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1926년 4월 순종이 승하하자 조선공산당은 민족주의 세력과 연대하여 6·10만세운동을 기획, 준비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국내적으로는 총책임자 권오설의 지휘하에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의 대표인 천도교 구파와의 긴밀한 협력을 주축으로 노동계, 학생계, 청년계를 총망라하여 거국적인 민족통일전선을 이루어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민족통일전선체를 ‘대한독립당’이라 칭하고, 대한독립당 명의로 격고문을 작성하였습니다. 또한 국외적으로는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가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의장 최창식과의 긴밀한 협조 체제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 산하 의열투쟁 조직인 병인의용대를 6·10만세운동에 맞춰 국내에 잠입시켜 의거를 실행하도록 계획하였습니다. 이렇듯 6·10만세운동은 조선공산당이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의 민족협동전선을 통해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실천적 결과물이었습니다.
또한 6·10만세운동 직후인 1926년 7월에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는 「조선공산당 선언」을 작성하였는데 그 내용의 핵심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의 당면 근본 과업은 일본제국주의의 압박으로부터 조선을 절대로 해방하는 것이어야 하며, 이 과업을 실행하기 위해서 민족혁명유일전선을 형성해야 한다. 또한 조선공산당은 전 조선 각 혁명단체들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공동의 적 일본제국주의자 및 그 주구들에 대하여 공동으로 투쟁하기 위하여 반제국주의 유일민족전선을 조직하자!” 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즉, 조선공산당 선언의 핵심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바로 ‘반제국주의 민족통일전선’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선공산당의 민족통일전선을 위한 노력은 1927년 2월 신간회의 창립이라는 결실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신간회는 사회주의 세력과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이 연합한 민족협동전선체로서 최절정기 기준으로 회원 수 4만여 명에, 국내는 물론 해외에까지 총 100여 개 이상의 지회를 둔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항일민족운동단체였습니다. 신간회의 활동 중에서는 원산총파업을 지지하고, 광주학생운동을 지원한 것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