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문
(권오설 선생의 아버지 소암(小巖) 권술조(權述朝)님이 죽은 아들에게 쓴 제문)
(본문의 선아(瑄兒)는 둘째 아들 권오기, 만아(滿兒)는 세째 아들 권오직)
임신년(壬申年 : 1932년) 3월 정유삭(丁酉朔) 19일 을묘(乙卯)는 곧 죽은 아이의 대상일(大祥曰)이나 대상의 제례(祭禮)를 행할 수 없어 아비는 눈물을 머금은 채 붓을 잡고 평생의 회포를 서술하여 영원히 하직하는 말을 고하여 이르노라.
아! 원통하고 슬프도다! 내가 너와 인간세상에서 부자(父子)라는 이름으로 정해진 것이 겨우 삼십 삼년인데,이 삼십 삼년 사이에 부자의 정을 나눈 것이 어찌 일찍이 그 삼분의 일이라고 되었겠으며 노심초사한 기간을 제외하면 실로 십분의 일도 되지 않을 것이다. 천지간(天地間)에 부자가 된 자로서 누가 나와 너처럼 소원(疏遠)하게 산 자가 있겠는가? 소원(疏遠)하게 산 것은 그래도 친근할 날이 있을 것이란 소망이 있어서였는데 그 소원함이 너무 심하여 병이 들어도 병든 것을 알지 못하고 죽어도 그 죽음을 알지 못하였다. 병을 간호하고 의원에게 묻는 것은 사람으로서 반드시 할 일인데 나는 약 한 첩도 써볼 수 없었고 생사(生死)의 결별(訣別)은 인간의 도리에 있어서 가장 지극한 일임에도 너는 나에게 한마디의 말도 할 수가 없었으니 천하고금(天下古今)에 아비로서 혹 아들에게 곡(哭)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내가 너에게 곡하는 것처럼 절치부심하면서 슬픔이 골수에 사무쳐 오래될수록 더욱 깊어지는 자가 있겠는가!
네가 과연 죽었느냐? 죽었다면 병으로 죽었느냐? 병은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못할 것이니 충직(忠直) 때문에 죽었느냐? 사람의 삶은 올바름에 있는 것이니 네가 만약 죽을 자리에서 죽었다면 어찌하겠는가! 고문(拷問)으로 꺾이고 분질러짐을 당하던 날에도 죽지 않았고 고초(苦楚)를 직접 받으면서도 의지와 기개를 충실히 기르면서 평소와 다름없는 것같이 편안하게 2년, 3년 오랜 기간을 견뎌왔는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변을 당하였으니 네가 과연 병으로 죽었는가? 충직 때문에 죽었는가? 하늘이여! 하늘이여! 어찌 죄라고 하겠으며 어찌 허물이라고 하겠습니까! 원통하고 슬프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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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안이 대대로 번창하지 못하였고 나 또한 여러 번 실패하고서 오랫동안 바라던 나머지 네가 태어났던 것이다. 타고난 바탕이 과히 나쁘지 않고 미목(眉目)이 맑고 깔끔하며 생김새가 단정하고,어릴 적부터 말을 배울 때도 자못 영민하였다. 그때 집안의 여러 사람이 아버님께 수학(受學)하러 오는 이가 날마다 방에 가득 찼었다. 어린 너는 장난치면서 즐겁게 놀면서도 서책(書冊)을 가까이하기를 좋아하였고 반드시 책을 펴고 덮는 것을 흉내 내었으며, 붓과 벼루를 좋아하였고 글씨를 본받으면서 아침저녁으로 배우니 귀와 눈으로 익히는 데 도움이 없지 않았으니 그 재주가 진실로 가르칠만하였다. 아버님께서 일찍이 천(天), 지(地), 일(曰), 월(月), 부(父), 모(母), 자(子), 녀(女) 등의 글자로써 시험해보시니 문득 그 뜻을 캐묻고 그 자형(字形)을 모사(模寫)함에 있어서 많은 의외의 일을 드러내었다. 네가 글씨를 씀에 있어서는 획(劃)의 선후(先後)며 변과 방을 한 번 듣고서도 틀림이 없었고, 붓의 놀림이 민첩 신속하였으며 글을 읽음에 있어서는 음(音)과 토(吐)와 구두(句讀)를 띔이 또록또록하게 들렸다. 아버님께서는 네가 깊이 생각하지 않고 금방 쉽게 대답하는 것을 나무라셨지만 너는 그 취지를 대강 짐작하여 알았으므로 그 재주에 맡기시고 심한 꾸중이나 독려하지 않으셨다. 유하은(柳霞隱) 척숙(戚叔)께서 일찍이 아버님에게 다니러 오셨다가 너의 글 읽고 글씨 쓰는 것을 보시고는 크게 칭찬하여 말씀하시기를 “참으로 비범(非凡)하구나. 이 아이는 재주가 있으니 반드시 학문을 해야 할 것이고 명민(明敏)하니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며 형의 집에 글이 뿌리내려 비로소 크게 떨칠 것이다”라고 하셨다.
만득(晚得)으로 낳아 기른 탓으로 아버님께서는 매우 사랑하셨으며 우리 내외(內外) 또한 너에 대한 사랑은 어버이로서의 본연적(本然的) 사랑으로서 더욱 사랑하였다. 그러나 너는 그 사랑을 믿고 교만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남과 어울려 놀 때에는 반드시 너보다 나은 사람을 따라 놀았으며 일찍이 한 번도 너보다 못한 사람을 추종(追從)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의 미움을 사는 일이 없었다. 이어서 너의 두 동생이 차례로 태어남에 문족(門族)들이 모두 “군의 집이 외로웠던 분을 이제야 씻는구나.” 하였으며 나 또한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기대하면서 조상님들이 덕(德)과 인(仁)을 쌓으신 보람이 장차 여기에 발현(發現)되고 이후로 창성(昌盛)할 기반이 장차 이에서 시작될 것으로 믿었다. 나는 너를 가르치고 길러서 성취시킬 책임이 있음에 그 소임(所任)을 감당하지 못할까 두렵기도 하였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너의 타고난 바탕이 못나지 않았고 성장하면서도 어리석게 되지 않았으니 사랑스러웠다. 가르치지 않아도 능히 충직(忠直)하고 노력하지 않아도 능히 청렴하고 검약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집의 예사로운 일이었다. 나는 또 살림살이에 밝지 못하여 위로는 가난한 가운데 부모를 봉양(奉養)하는 일과 아래로는 자식을 양육(養育)하는 일에 오직 네 어미의 내조(內助)에 힘입었으니 옷은 항상 너에게 추위를 근심하게 하였고 밥은 매양 배고픔의 한(恨)이 많게 하였다. 내가 항상 너에게 “배부르게 먹고 따스한 옷 입는 것이 남들만 못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 너는 반드시 내가 말하는 뜻을 잘 알아들었다. 권장하고 인도하여 날마다 성장하기를 바라면서 세상사는 재미를 보고자 하였으며 너로 하여금 일찍 장가들게 한 것 역시 늙으신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그 단조로운 생각이 독장수가 셈하는 꾀와 같아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런데 세상이 바야흐로 뒤집혀서 그 어수선함이 날로 심해지고 큰 파란이 밀어닥치니 대세(大勢)를 누가 막겠느냐? 부득이 시속(時俗)에 따라 처신하고 공부하지 않을 수 없기에 가숙(家塾)을 시작하여 신구학문(新舊學文)을 반반씩 가르치다가 끝내는 동화학교(東華學校)로 옮겨 합병(合併)하였다. 날마다 십리 길을 일찍 등교했다가 늦게 귀가하였지만 비바람과 춥고 덥기 때문에 학업을 빠뜨리거나 지각하지 않았으며,살을 에는 듯한 주위와 배고픔을 마음에 두거나 얼굴색에 드러내지 않고 굳게 마음에 새겨 한결같이 힘쓰면서 학칙(學則)을 준행(遵行)함이 3년 동안을 하루같이 하였다. 총명하게 기술하는 성품과 시종 게으르지 않고 정성껏 힘쓰는데 대하여 동창(同窓), 제우(諸友), 교수(敎授) 제위(諸位)가 여러 번 나에게 칭송하였다.
너는 졸업한 뒤에 상급학교로 진학하려고 했으나 힘이 마음을 따르지 못하여 너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였다. 하루는 네가 나에게 대구로 유학하고 싶다고 했는데 내가 자력으로 학자금을 마련할 수 없음에도 차마 굳이 말리지 못하였다. 네가 떠난 지 수개월이 되는 동안에 계속 오가는 편지로써 번번이 돌아오기를 재촉했지만 여관비가 쌓였으니 어찌하겠는가? 다행히 경주의 최준(崔俊) 형이 한 번 보고서 그 재주를 아깝게 여겨 부채를 상환하고 곧 불러다가 고등학교에 입학시키고 학비를 담당한다는 편지를 받고서는 다행으로 여기고 그 기쁨이 뛸듯하여 마음속으로 어진 주인을 만났다고 치하(致賀)하였다. 그런데 그 약속이 얼마나 굳은 것이었던지 그 사이에 이간하는 자가 끼어들어 틈을 냄에 사람으로서 자발(自發)한 양심을 거스르고 사람이 나아갈 앞길을 빼앗아 중도에서 길을 바꾸게 하고 누대(樓臺)에 오르려는 사람의 사다리를 떼어버렸다. 부득이 물러나와 다까하시(高喬亨) 선생에게 말하니 다까하시 선생은 개탄하면서 말하기를 “자네가 퇴학한다면 학교가 학교답게 되겠는가?”하면서 몸소 주변에서 사람을 찾아 달성(達城)에 사는 서군(徐君)에게 부탁하여 학업을 마치게 하였다. 아! 다까하시 선생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고 또한 오래 알아둘 만한 사람도 아니며 다만 일시적인 교수(敎授)일 뿐인데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그의 사람을 사랑하고 성공을 좋아하는 공리심(功利心)이 우리들 선비와는 특별히 다름을 알 수 있었다. 아! 내가 힘이 없어서 아비로서 자식을 교육하는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너로 하여금 사회에 출발하는 초기부터 짠맛,신맛을 모두 맛보게 하였으니 소경이 개천 나무라기로 어느 여가에 원망인들 하겠는가? 고난(苦難)을 겪지 않으면 격발(激發)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가 너를 면려(勉勵)한 바이며 고난(苦難)이 복(福)의 근원이 된다고 한 것이 네가 나를 위로한 바였다. 조각배가 큰 나 루에서 모두 빠지려는 대중을 건너게 하고 작은 힘으로 황하의 넘치는 탁류에서 구하려 하였다. 먼저 알고서 뒷사람을 깨우치게 하였으니 공상자(空桑子, 은나라의 유명한 재상 이윤伊尹을 말함)가 아니고 그 누구이며 먼저 근심을 하고 나중에 즐거워함은 범희문(范希文, 범희문은 송 나라의 명 재상 범중엄范仲淹을 말함. 희문은 그의 자.)이 없으니 누구와 더불어 돌아갈 것인가?
전남(全南) 광양(光陽)에서 일년 있는 동안에 비록 오오쯔까(大塚) 선생을 만나서 알게 되었지만 뜻한 바가 아니었기에 마침내 그 길에서 되돌아오기를 결심하였다. 풍서(豊西)에 학교를 다시 열고 교원을 초빙하여 창설하고 인재를 모아 교육함에 한 지방의 명예를 크게 얻었으며 이들을 계도하고밝게이해시켜서 오직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는데 마음을 다하였다. 약간의 월급도 사사로운 일에 쓰지 않았고 학비를 대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두루 도와주고 지필(紙筆)을 갖출 수 없는 자가 있으면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니 이럼으로써 도처의 학도들이 마음으로부터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그것은 마땅히 거친 체험으로써 잘 미루어 헤아렸기 때문이다. 간혹 단점이 있다는 것은 재물과 이익에 지나치게 담박한 것이라 할 것이니 이것은 지금 세상 사람으로서 생업(生業)으로 삼을 것이 아니다.
내 또한 일찍이 “살아가는 계책 때문에 너의 마음을 더럽히지 말라.”고 하였고 너는 매양 말하기를 “제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런 마음이 있는 것이며 만약 부유(富裕)하였다면 이런 마음이나마 지니고 있겠습니까? 빈궁함을 탓하지 마소서. 지금 초췌하고 극심한 고통을 겪는 것이 어찌 다만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이 제자리를 얻지 못한 것뿐이겠습니까? 비록 진초(秦楚)의 부(富)라도 저는 저의 의(義)에 따라 살 것이며 무릇 지금 사람으로서야 그 어찌 좋아질 수 있겠습니까마는 조만간에 부모를 위할 날이 어찌 없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때 다행히 손자를 보게 되어 집안의 경사(慶事)가 천금(千金)의 보배를 얻은 것보다 더하였는데 하늘이 나에게 복을 주지 아니하여 갑자기 죽고 말았다.
너의 두 아우가 동경(東京)에 고학(苦學)하러 갔으니 이것을 어찌 내가 차마 시켰을까마는 너는 좋아서 권하였는데 겨우 일년 만에 예전에 없는 지진(地震)의 재난(災難)이 일어나고 무고(無辜)한 사람을 독살(毒殺)한다는 풍문(風聞)이 사방에서 들꿇었다. 가고 싶어도 길이 막혔고 묻고자 하여도 우편이 끊기어 너도 또한 그 아우들이 꼭 죽은 줄로 추측하였고 나 또한 그들이 살아서 온전할 가망이 없다고 하였으니 이때에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 한 실상은 오직 내가 알고 네가 알 뿐으로 어찌 감히 무병자(無病者)를 향하여 그 아픔을 말하겠는가? 만사일생(萬死一生)의 위난(危難) 중에서 다행히 살아서 돌아왔으니 까닭 없이 사지(死地)에 몰아넣은 것은 나이고 사지(死地)에 빠진 것올 살려낸 것은 하늘이다. 부자 형제가 같이 모여 경사(慶事)를 함께 하였으나 우리 집의 하늘 역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모두 너희들이 불능(不能)한 바를 증익(增益)되게 한 것이다.
일찍이 말하기를 “천하의 허다한 일반적인 사물(事物)은 모두 천하의 허다한 일반적안 사실(事實)에서부터 비롯되며 모두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바이니 사물(事物)의 자아(自我)라는 것은 사실(事實)의 당위(當爲)인 것이다. 괴롭고 즐겁고 달고 쓴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마땅히 자신의 힘을 다하여 자신의 몸을 세울 뿐이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가히 타인에게 의지하고 기댈 수 있겠는가? 매양 열국(列國)의 위인들이 흥폐를 도모하고 명신(名臣), 지사(志士)가 보국(報國)함에 있어서 공훈을 세우는 등의 역사를 개연(慨然)히 여기고 사랑하며 완상하고 흠모하였다. 저것은 어떻고 이것은 어떻다고 한다면 이것은 기어서 우물에 들어가려는 어린애는 어린애의로 잘못이 아님과 같으니 진실로 차마 하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이 있는 자가 가만히 보기만 하고 그를 구제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익을 즐기고 염치를 버린 채 도도히 혼란한 세상은 계속되는데 피가 끓어오르고 울음을 삼키면서 늠름하게 나라를 생각하며 의논하는 것이 어찌 능수(陵水)의 행인(行人)이라도 호구지책(糊口之策)만을 하고 있겠으며 맥구(麥邱)의 노인인들(맥구는 중국 제나라의 지명. 제나라 환공이 맥구의 늙은이에게 나이를 물으니 83세라. 훌륭하다고 칭찬하고 장수의 비결을 가르쳐 달라 하니 금옥을 귀하게 여기지 말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라 깨우쳤다 함 ) 어찌 오로지 자신의 몸만을 도모하는 계획을 쓰겠는가?
이때 만아(滿兒)는 곧 오직(五稷)인데 너를 따라 서울에서 노닐었는데 생소한 곳에서 적숙공권(赤手空拳)이라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음에 간다는 말도 없이 멀리 러시아로 떠났으며 선아(瑄兒) 곧 오기(五夔)인데 외사촌 종우(宗佑)군을 따라 대구의 상점(商店: 무영백화점)에 머물고 있었다. 그리하여 오직 나 홀로 옛집을 지키면서 쓸데없이 심신(心身)을 허비하였는데 바로 이즈음에 선아(瑄兒)가 엽서를 보내왔는데 달리 안부도 없이 큰 화(禍)가 앞에 닥친 것 같다는 것이었으니 그 연유(緣由)나 별다른 까닭을 알지 못했으나 가슴이 두근거리고 눈앞이 캄캄하였다. 즉시 전보를 지고 갔더니 다른 사고가 아니라 네가 구속되는 것을 보았다는 기별을 들었다는 것이었으며 이는 곧 병인년(丙寅年: 1926년) 4월 28일이었다. 그는 안색(顔色)이 없이 나를 향해 근심스러워하였고 나 또한 그를 대하여 우두커니 바라보며 말이 없다가 한참 만에 스스로 마음을 안정시키고 말하기를 “명성이 높이 드러나면 오래 살기 어렵다는 이 말은 고인 (古人)의 세상 살아가는 계명(戒銘)이고, 둥근 구멍을 생각하지 않고 모난 자루를 맞추려고 한다는 이 말은 선현(先賢)들이 시대를 한탄한 경구(警句)이다. 너는 너의 형을 알지 못하느냐? 본디 품은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행함에 두려울 것이 무엇이겠으며 또 푸른 하늘이 위에 있으니 죄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였다. 그는 곧바로 상경(上京)하려고 하였지만 나는 말하기를 “방금 불같은 경계망이 펼쳐져서 매우 긴박한 가운데 있으니 간들 어떻게 손써볼 수 있겠느냐.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아직은 마음을 느긋이 하고 천천히 기다리면서 신문을 보고 그 형편을 자세히 살펴본 뒤에 가는 것이 좋을 듯하니 조심하고 너무 조급히 서둘지 말라.”고 하였다. 이렇게 상의하고 나는 즉시 차를 돌려 허둥지둥 정신없이 집으로 향했는데 날은 저물고 길은 먼지라 이것이 인간의 어느 세상인가 싶었다. 그 뒤 며칠이 못되어 너의 여러 해 만의 편지를 받았는데 답서(答書)를 하려고 해도 무슨 말을 쓰겠는가? 다만 평소에 환란(患亂)을 겪은 것으로써 현재의 환란(患亂)을 이겨내는 길에 힘쓰라고 할 뿐이었다. 선아(瑄兒)는 또 의논한 바와 같이 서울로 올라가서 형제가 상면(相面)한 것을 매우 상세히 알려왔는데 동회(東會)와 서사(西社) 사이에서 마음을 초조히 하고 남산(南山)과 북악(北岳)의 산마루에서 피눈물을 흘렸으며 아뢰려고 해도 알아줄 하늘이 없고 호소하려고 해도 들어줄 땅이 없었으니 세상에서 누가 그 마음을 알겠는가? 사람은 그 뱃속을 헤쳐보기 어려우니 땅에는 사람을 낚아 함정에 빠뜨리고 제 이익을 취하려는 무리로 가득하니 어찌 함정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굴러 내리는 자가 없다고 하겠는가? 이때의 선아(瑄兒)의 마음을 나는 헤아려 알 수 있었다. 바야흐로 그 엄한 문초(問招)와 혹독한 매질을 당하는 자리에서 만약 위세(威勢)를 두려워하여 명령에 복종하고 마음을 굽혀 구차하게 곤경을 면하려고 하였다면 몰래 사나움을 감춘 승냥이의 어금니도 오히려 멈추었을 것이고 가만히 내뿜는 살모사의 독(毒)도 또한 쉬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아홉 번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겠다는 그 초심(初心)은 차라리 몸이 해체(解體)되는 한이 있더라도 변하지 않고 굳게 지켰던 것이다. 그러기에 저들은 위력(威力)을 함부로 행사하고 독수(毒手)를 마구 써서 수족(手足)을 묶고 단근질을 하며 꺾고 비틀면서 이기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듯하였으니 어찌 기운이 빠지지 않을 수 있으며 목숨이 끊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처럼 사리에 어둡고 미련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또한 오히려 넋이 달아나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의사를 불러 진찰하니 다행히 다시 소생할 수 있었다. 하늘이여 하늘은 혹시 굽어 살폈나이까? 전국의 사우(社友)는 간담이 찢어졌고 해외(海外)의 변호인(辯護人)도 혀를 내둘렀으며 동서양(東西洋)에 처음 있는 가장 큰 공적사건(公的事件)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사건이 거의 일년이나 오래 끌었으니 그동안의 고초를 내가 하나하나 다 알 수 없으며 너도 무슨 마음으로 들려주려고 하였겠느냐? 그 이듬해에 사건이 결정되었는데 5년 징역이었다. 어찌할 수가 없어 오직 세월이 가기만을 재촉하였다. 금석(金石)이 아닌 체질(體質)을 가지고 방칫돌 밑에 깔려서도 몸을 보전함은 날카로운 칼날이라도 밟고 갈 수 있다는 일편단심(一片丹心)이 아니었겠느냐? 오직 이렇게 믿지마는 너는 본디 허약한 증상이 있으니 겨울 추위와 여름 더위가 더욱 심할 때에 는 언제나 병이라도 날까 하여 근심스러웠는데 너는 편지할 때마다 항상 심려하지 말라고 하였다. 비록 염려하지 않으려 한다고 하여 그렇게 되겠느냐? 좋은 날이나 명절에 사방 이웃에서 노래와 웃음소리가 집집마다 떠들썩하게 들리면 나는 귀를 막아 가리고자 하였고 백설(白雪) 같은 떡, 구슬 알 같은 쌀밥이며 사철의 맛좋은 음식이 반위에 올라도 나는 목구멍으로 내려가지 않았으며 구곡(九曲)의 연한 창자가 마치 녹을 듯하여도 오히려 강건(强健)한 척한 것이 네 아비였느니라.
이 해 9월 20일 네가 선아(瑄兒)에게 편지하여 말하기를 “다음달 초하룻날은 어머님의 회갑생신(回甲生辰)이다. 불초(不肖)한 형이 집에 있지 않다고 하여 그냥 헛되게 넘기지 말고 간략하게나마 음식을 갖추어서 숙부(叔父)님들과 숙모(叔母)님들을 초청하여 하루를 즐겁게 해 드리기 바란다. 내가 비록 여기에 있지만 멀리서나마 끝없는 장수(長壽)를 빌어드리겠다.”하였는데 너의 어머니는 편지를 보고 울면서 말하기를 “네가 옥중(獄中)에 있으니 즐거울 수 없을 것이며 나 또한 누구와 즐거워하겠는가?”하였다. 마침 순칠(舜七: 오설의 외척 유기영의 字)이 왔다가 돌아갔으며 나는 홀로 무료하게 그날을 보냈는데 너 또한 반드시 홀로 서러운 감회에 젖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또 그 이듬해는 나의 갑일(甲曰)이었는데 편지로 부탁함이 또한 전과 같기에 안으로 모자(母子)가 상의(相議)하기를 번번이 편지로 부탁하는 것이니 끝내 저버릴 수 없다 하였으며 나 역시 생각건대 시하(侍下)에 있으면서(계모 정씨가 생존하였음) 한결 같은 고집으로 굳이 말릴 수 없었고 여러 인척(姻戚)들 집에서 보내온 음식물 또한 경비를 들여 새로 장만하지 않더라도 넉넉하다고 할 만하였다. 기왕에 혼자 먹을 수 없기에 이웃의 벗들과 족친(族親)들을 청하여 함께 먹으며 즐겼는데 모두 네가 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네가 있어서 잔치를 크게 베풀었더라도 오히려 생일을 맞아 들아가신 부모를 추모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을 것인데 하물며 즐겁지 않으면서 억지로 노래하는 것인지라 이 경우는 아픈 마음의 쓰라림 때문에 부모들 추모하는 슬픔은 느껴볼 겨를도 없었다. 네가 출옥하여 돌아오는 날을 기다려 잔치를 마련하고 즐거운 마음을 곱씹으면서 한 번 즐겨보려 하였는데 하늘이여! 하늘이여! 부자의 정을 앗아감이 어찌 이토록 극단에 이르게 하십니까? 원통하고 슬프도다.
빈부(貧富)의 문하(門下)에서 사귄 손들의 정이 달라서 손끝을 뒤집듯하고 풍우(風雨)가 변태(變態)하듯 하며 남의 불행을 보고 좋아하는 사람은 전면(面前)에서는 칭찬하면서도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면서 화재(火災)를 구제(救濟)한다는 자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잘난 아들이 있으니 그대는 무슨 근심이 있으며 아들이 공산주의운동을 하고 있으니 그대는 살 길이 있는데 무엇을 남에게 구하고 무엇 때문에 가난함을 걱정하는가?”하고 핀잔하였다. 내 비록 글을 알아듣는 귀는 없지마는 어찌 말을 듣는 귀야 없겠는가? 살갗을 갈라놓고 소금을 뿌리듯 어찌 이처럼 악독(惡毒)할 수 있는가! 입을 다물고 달게 받아들이며 아픔을 참고 뼈에 새기면서 감히 남에게 말을 하지 못하였으나 장차 부자(父子)가 서로 만나는 날에 그들을 향하여 일장설파(一場說破)하고 일소(一笑)에 부치려고 다짐했는데 이제는 모두 글렀구나. 사람들이 나의 불행을 보고 좋아했던 것이 가히 적중(適中)한 것이라 하겠으며 심장과 머리에 쇠못을 박는 것보다 통한(痛恨)이 더욱 격렬하니 지금 너에게 말하지 않고 다시 누구와 더불어 말하겠는가?
원통하도다! 기사년(己已年: 1929년) 섣달그믐 쯤 너의 편지에 “지금부터 190여일 지나면 不肖는 마땅히 귀가(歸家)하여 뫼시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 또한 마음속으로 기뻤지만 오랫동안 구속된 생활을 한 나머지 조급한 생각으로 빚어지는 해(害)가 있을까 두려워서 답장으로써 “백리(百里)를 가는 자는 구십리(九十里)를 반(半)으로 삼는 것이니 마음을 급하게 먹지 말고 날짜가 한정되어 있으니 저절로 감해져서 줄어질 것이므로 원컨대 평소와 같이 마음을 편하게 가져라.”고 했던 것이다. 나 또한 암산(暗算)하여 보니 당초에 햇수를 계산했을 때는 족히 2,800여일 이나 되어 오히려 망망(茫茫)하였는데 이제 일수(日數)를 헤아려보니 날이 가고 달이 줄어들어 얼마 남지 아니하였다. 또 봄이 장차 돌아오면 천지(天地)에 화기(和氣)가 펼쳐질 것이고 오는 여름의 혹서를 평온하게 지나면 두렵게 생각할 날은 따라서 면할 수 있을 것이며 닥쳐오는 한겨울은 다시 걱정할 것이 없었다. 하루 이틀 손꼽아 기다렸는데 또 뜻밖의 일이 생겼다. 정월 28일에 만아(滿兒)가 러시아에서 학업을 마치고 돌아와서 구속되었다는 것을 신문에서 처음 보고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이며, 그다음에 그가 보낸 편지를 보아도 과연 그러하였다. 남은 혼이 다시 놀람에 어찌 심정을 진정하겠는가? 선아(瑄兒)는 이때까지 대구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 소문을 듣고 곧바로 상경(上京)하여 상면(相面)한 후에 곧 편지로써 이르기를 “형님의 형모(形貌)가 환골탈태(換骨奪胎)하듯 전일(前日)과는 크게 다릅니다. 형님은 비록 병이라 하지마는 대단한 것이 아니며 여기서도 치료할 길이 있으니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또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병이 가볍지는 않은 것 같으니 조금은 걱정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 듣고 보니 비록 놀랍고 염려스러웠지만 측은할 뿐 손을 쓸 수가 없었다. 평소의 병을 묵혀 버려두어서 허(虛)한 틈을 타고서 갑자기 발병(發病)한 것일까? 이미 이르기를 병을 치료할 마땅한 곳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들에게 어찌하여 짐독(鴆毒, 짐새의 깃에 있다는 맹독)으로 사람을 죽인 양숙자(羊叔子, 서진西晉의 장수 양호羊祜의 자. 오나라 장수 육항陸抗이 중병에 걸리자 양호가 약을 보냈는데, 부하들이 모두 의심했으나 육항은 양호를 믿고 짐새의 독이 든 약을 먹고 죽었다)가 있었을까? 하늘을 바라보고 마음으로 빌었으며 날마다 병이 나았다는 기별을 바랐는데 3월 23일(양력 4월 21일) 문득 전보가 날아들었으니 흉음(凶音)을 알리는 것이었다. 하늘인가 땅인가! 귀신인가 사람인가! 시대(時代)의 탓인가 운명(運命)의 탓인가! 꿈인가 생시(生時)인가! 땅을 치고 하늘에 부르짖어도 망망(茫茫)하고 참담하기만 하였다. 여비(旅費)에 구애되어 즉시 출발하지 못하고 그 이튿날 일찍 출발하였는데 종군(宗君) 문현(文顯)이 수행하였으며 그의 부축을 받으며 서쪽으로 향하여 걸어가니 마치 술에 취한 것 같았고 미친 것과도 같았다. 살아서 서로 만나지 못하였는데 죽은 뒤에 누구를 만나려고 허둥지둥 이렇게 가고 있는 것일까!
기차에 이르렀는데 차중(車中)에서 너와 마음으로 통하는 벗을 뜻밖에 만나 손을 잡고 피눈물을 흘리며 술과 음식으로써 나를 위로하고 일마다 앞을 인도하여 나로 하여금 창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거리는 중에도 넘어지고 자빠지지 않게 한 것은 모두 이 사람의 덕택이었다,밤에 남대문 앞에 다다르니 밤은 이미 깊었다. 여관에 투숙하고 이튿날 아침에 일찍 당지(當地)에 갔더니 소위 형무소의 문 밖이었으며 경위를 물으니 일은 이미 치상(治喪)하여 나갔으나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형무소의 문을 바라보니 당장 머리를 박아 부수어 피눈물을 쏟으면서 흔쾌히 한 번 죽어지고 싶었으나 또한 산 사람도 그 안에 있는지라 굳이 참고 머리를 돌려 무거운 발길을 옮겼지만 어느 곳에 누구를 따라갈 것인가? 길을 끼고 좌우에는 모두 사식점(私食店)이었는데 한 노파에게 물었더니 그 노파는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하기를 “그 사람이라… 그 사람 참으로 장합니다. 그 사람은 어제 동생이라는 사람이 들것에 담아서 나갔습니다.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발을 동동 구르는 형상이랑,땅에 엎드려 애통해 하는 모습을 이 거리에서 본 사람은 전을 거두고 눈물을 뿌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가 간 곳이 필시 신간회(新幹會)일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비로소 선아(瑄兒)가 먼저 와서 시신(屍身)을 수렴(收殮)한 것을 알게 되었으니 망연자실(茫然自失)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던 중에서도 오히려 조금은 마음이 놓이는 듯하였다. 즉시 신간회(新幹會)로 갔더니 선아(瑄兒)는 이미 사우(社友)들과 더불어 대렴(大殮)을 마쳤으며 시신(屍身)을 갈무리할 널과 반장(返葬)할 계획까지 이미 정해 놓았다. 관(棺)을 어루만지면서 한 차례 통곡을 하고 선아(瑄兒)의 말을 들으니 “이미 17일(양력 4월 15일) 급하다는 전보를 받고 즉시 달려와서 18일 형님이 계시는 곳으로 달려갔더니 이미 숨이 끊어지려 하고 정신을 잃은 것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형님! 형님!’ 하고 부르면서 저를 아시겠습니까? 하였더니 이에 눈을 뜨시고 말하기를 “내 아우가 왔느냐? 내가 내 동생을 어찌 모르겠느냐?” 하였습니다. 곧 두 손으로 목을 껴안고 볼을 비비면서 형님은 저를 껴안고 저는 형님을 껴안았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해도 말에 앞서 이가 갈렸으며 이를 갈고 다시 말을 하려고 해도 문득 울분이 격해져서 말은 끝내 할 수가 없고 분격한 주먹으로 땅을 치며 이를 갈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형님께서는 ‘아우야 오늘 밤은 나와 같이 자자’고 하였으니 이는 곧 형제간이 생사(生死)의 즈음에서 결별한 처지인데 승냥이의 마음이요 이리의 성질이지 저들이 어찌 사람이라고 할지 함께 외박(外泊)하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눈물을 감추고 나와서 자고 아침에 들어가니 이미 형님은 운명(殞命)하였으며 이에 말하기를 ‘살아서 내보내지 않음은 法이라 하더라도 죽어도 또한 내보냄을 허락하지 않겠느냐? 산에 묻게 할 것인가? 형무소에 빈소를 마련하게 할 것인가?’ 하였더니 저들은 말하기를 ‘산은 갑자기 허락할 수가 없고 형무소는 더욱 불가하다.’ 바야흐로 분을 머금고 있던 나머지 치솟는 격분과 분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이에 실성(失性)하여 울부짖고 흥분하여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희들은 개나 돼지만도 못하다. 산도 안 되고 형무소도 안 된다면 시신(屍身)을 등에 지고 종로(鐘路) 거리를 돌아다닐 것이다.’ 하였습니다. 저들도 또한 사람인지라 둘러서서 듣고는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습니다. 이에 말하기를 ‘그러면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하였는데 신간회(新幹會)로 가겠다고 하였더니 그들은 말하기를 ‘빈소(殯所)를 마련할 만한 빈 방이 있느냐?’ 하기에 있다고 하니 ‘그러면 가라.’고 하여 비로소 여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고 전후좌우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신간회(新幹會)의 여러 친우(親友)들이 면면이 와서 조문(弔問)을하며 너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고 세상을 위하여 피눈물을 쏟는 사람도 있었으며 나를 위하여 눈물을 거두는 사람도 있었다. 말하기를 “저희들도 또한 모두 일찍이 수형생활(受刑生活)을 겪은 것이 3, 4년 혹은 6, 7년이며 구차스럽게 죽음을 면하고 다행히 살았으나 모두 이 형에 대한 죄인입니다. 이제 이 형은 죽을 곳에서 죽었습니다. 원컨대 부자의 사사로운 정으로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하면서 나에게 깊이 사례하고 빈소에 후의(厚誼)를 베풀었으며 도로(道路)에 버리지 않은 것이 다행스러웠다.
나는 하룻밤을 묵고 먼저 떠났으며 선아(瑄兒)와 종군(宗君)은 너를 싣고 뒤에 출발하였다. 그날은 저물어서 집에 도착했는데 곧 23일이었다. 원통하고 슬프도다! 네가 말한 바의 앞으로의 기간 190일은 이제 앞으로 남은 날짜가 100일도 되지 않는데 이 무슨 행색(行色)인가! 살아서 10년 동안 네가 돌아오기를 바란 것은 어찌 그토록 더디었으며 죽어서 하루 만에 상여에 실려감은 어찌 그토록 빠르단 말인가! 10년 동안 고대(苦待)하며 바라던 마음으로써 이 하루 만에 실려 오는 빠른 상여차를 맞이하니 앞이 캄캄하고 아득하였다. 하나의 나무토막처럼 넘어진 시체이니 네가 참아 할 짓이며 내가 바란 일이겠는가!
하늘이여! 하늘이여! 이 어찌 차마 할 짓입니까? 칠순(七旬)의 조모(祖母)께서 부여잡고 불러 봐도 응답이 없고 갑절로 사랑하는 자애(慈愛)로운 어미가 절규(絶叫)하며 불러도 들음이 없으며 우러러 바라보는 너의 아내가 자절(自絶)하려 하여도 돌아보지 않는가? 네가 무척이나 사랑했던 자는 질녀(姪女) 임(任)인데 그가 비록 얼굴은 알지 못하지만 언제나 백부(伯父)가 돌아오실 기일을 물었으며 백부(伯父)는 어디로 돌아가시느냐고 목이 메도록 울부짖어도 너는 어찌 가여워하지 않았던가? 숙부(叔父)들과 숙모(叔母)들,온 문중(門中)이 함께 슬퍼하여도 알지 못하니 이 어찌 네가 날짜를 손꼽으며 돌아와서 모시겠다던 마음이며 무심함이 어이 이 같단 말인가! 이튿날 새벽이 밝을 무렵 수의가 대략 갖추어져서 장차 반함(飯含)과 대렴(大殮)을 고쳐 하려고 관(棺) 뚜껑을 열어보니 단정한 모습은 변함이 없이 잠자는 듯하였으며 금니도 번쩍번쩍하였다. 고문(拷問)한 흔적은 푸릇푸릇한 검은 점을 이루었으니 이 모두가 독(毒)을 쏜 자국이었다. 내 비록 목석(木石)이라 할지라도 무슨 마음으로 차마 네 몸에 손을 대고 싶었겠느냐마는 나는 내 손으로 너의 입에 반함(飯含)을 하고 너의 시신을 염하였다. 다음에 입관(入棺)하려고 목수에게 관(棺)을 만들게 하는데 이를 엄금(嚴禁)하니 저들은 어찌하여 쇠사슬을 펴고 그물을 치듯 속속들이 경계(警戒)하였으며 죽어도 오히려 뉘우치지 않을 것처럼 사방에 가시를 무너뜨려 놓고 손님의 출입을 금지하고 예(禮)에 따라 장사(葬事)를 치르게 하지 못하게 하였을까? 관(棺)은 서울에서 서푼(三分) 송판(松板)으로 만들었고 외관(外棺)은 함석으로 납땜을 하여 시취(屍臭)가 풍기지 않게 하였는데(일제는 고문의 흔적을 은폐하기 위해 철제를 납땜하였는데, 권오설 선생의 아버지는 시취를 막기 위해서라고 하고 있음. 의도적인 기술로 추정됨 - 편집자주) 처음의 그 관(棺)을 쓰게 하였으며 공동묘지(共同墓地)에 장사하되 봉분(封墳)을 짓지 말고 평장(平葬)으로 하게 하였으며 외래조객(外來弔客)을 일체 엄금하였다. 내가 강직한 사람이 못될 뿐 아 니라 그로 인하여 부랴부랴 관(棺)을 묻어둔 채 1년, 2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부자(父子)의 정에 따른 일을 펴지 못하였다. 하늘이여! 하늘이여! 이 어찌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원통하고 슬프도다! 너의 밝은 혼령은 나를 따라왔느냐? 마루에 있느냐? 뜰에 있느냐? 오로지 형식(形式)만 티끌 세상에 부쳐두고 몸을 깨끗이 하여 어느 높은 곳으로 갔느냐? 마침 봄의 화창함을 만나 만물과 함께 변화(變化)하였느냐? 우뢰가 되고 천둥이 되어 원한과 노여움을 펼치려느냐? 온화한 바람이 되고 단비가 되어 못 물로써 광야로 흘러내리려느냐? 배가 되고 노가 되어 많은 사람을 건너게 하려느냐? 진(秦)나라를 물리친 고사(高士) 노중달(魯仲達)을 만나고 대나무 위 높은 곳의 봉황이 되려느냐? 송나라 원수를 갚은 문천상(文天祥)의 충혼(忠魂)과 인사하고 땅에 뿌리박지 않은 꽃다운 난초를 그리려느냐? 희생적(犠牲的)이고 영생적(永生的)임이 곧 너의 마음이니 옥(玉)으로서 부서질지언정 온전한 질그릇이 되지 않으려 하였고 차라리 난초로서 꺾일지언정 쑥으로서 무성하지 않으려 한 것이 곧 너의 뜻이었다. 그러기에 전날 밤 꿈에 나에게 웃음을 머금고 나에게 고하고 죽어서 땅속으로 들어갔으니 어찌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때때로 신문지상에 너를 아는 벗들이나 여러 사람들의 애도하고 애석해 하는 말을 보아 그것이 너를 송축(頌祝)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사람도 없지 않으니 입에 재갈을 물리고 혀를 묶는다고 하여 누가 감히 말하지 않겠느냐? 하물며 네가 보국구민(報國救民)에 급급(汲汲)했던 피나는 정성을 여러 문자(文字)로 등재(騰載)된 것을 찾아 모으면 수레에 실을 만큼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니 그것은 후일에 역사의 자료가 될 것이며 하늘의 뜻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동서양(東西洋)에 사회(社會)가 없다면 그만이지만 만약에 있다면 그것은 능히 대서특필(大書特筆)로써 선구자(先驅者) 누구라 할 것이며 그리하여 너는 영원히 살아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장차 눈을 높은 곳에 달아두고 그것을 기다릴 것이다.
원통하고 슬프도다! 남녀 사이에 부부(夫婦)의 낙(樂)은 사람으로서 크나큰 소원인데 아! 가엽게도 네 아내는 우리 문중(門中)에 들어온 시초(始初)부터 일찍이 하루라도 금슬(琴瑟)의 낙(樂)을 즐겨 보았을까? 만약 전에 잃어버린 아이를 잘 보육하였으면 이미 성장하였을 것이며 그렇게 되었더라면 너 또한 의탁할 곳이 있을 것이고 네 아내 또한 따를 곳이 있을 것이며 나 또한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 또 형제가 무고(無故)함도 인간의 한 가지 낙(樂)인데 선아(瑄兒)는 네가 죽은 이래로 분이 치솟아 정을 붙이지 못하여 집에 있어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밖에 나가도 마음에 맞는 일이 적으며 행오(行伍)를 잃은 찬 하늘의 기러기처럼 슬피 울고 무거운 짐을 진 약한 말처럼 이겨내기 어려우니 마음에 스치고 눈에 띄는 것마다 창자를 가르고 마음에 불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한 가지도 없다. 눈앞에 벌어진 일의 형세(形勢)가 마치 놀란 파도와 거센 물결 위에서 노를 가벼운 쪽배가 닿아서 쉴 언덕이 없는 것 같건만 백번을 생각해도 죄는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여! 하늘이여! 원통하고 슬프구나! 어느 사이에 일년이 지나고 또 일년이 되는구나. 장례,우제(虞祭),부사(祔祀), 소대상(小大祥)과 담제(禫祭)의 예(禮)를 한 가지도 예(例)에 따라 못하였고 기왕에 예(禮)에 맞게 못하였으니 변칙적으로 줄인 범절이 또한 어찌 예절(禮節)답게 할 수 있었겠느냐? 참췌(斬衰)의 복을 차마 기일이 지나도록 오래 몸에 걸치고 싶지 않아 부득이 벗기로 결심하였지만 아직까지 한 쪽에 두면서 너를 다시 양례(襄禮)를 잘 치르는 후일을 기다려서 우제(虞祭)며 부사(祔祀) 및 담제(禫祭)를 행하고 너에게 고하고서 복(服)을 벗으려고 한 것이다. 이것도 예에 없는 예인지라 반드시 큰 꾸짖음을 면할 수 없을 것인데 너는 또 이렇게 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위고(危苦)를 행하고 번거로운 욕도 피하지 않는 것이 덕이라는 말이 없지 않으니 비애(悲哀)를 주로 삼은 것이다. 위로 집에 있으면서 학업에 종사한 고생은 그만두고라도 아래로 네가 구속되기 전 3,4년에서부터 금일에 이르기까지 나는 너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며 너도 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끝내 서로 만나지 못한 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네가 나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어찌 끝이 있겠으며 나도 너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가슴속에 가득하다. 네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다음날 구천(九泉)에서 서로 만나는 날을 기다려 다오. 나는 이제 마음이 날로 약해지고 기운도 날로 줄어드니 이 세상에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으며 너와 더불어 서로 회포를 펼 날도 반드시 멀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도 마음이 아프고 붓이 더듬거려 간략히 만분의 일을 서술하면서 너에게 고하는 것이니 이것이 곧 유명(幽明)의 사이에서 부자간(父子間)의 영결(永訣)의 말이로다. 너는 혹 이 말을 듣고 나의 마음을 알려는가? 원통하고 슬프도다! 상향.
[원문은 한문]

제문
(권오설 선생의 아버지 소암(小巖) 권술조(權述朝)님이 죽은 아들에게 쓴 제문)
(본문의 선아(瑄兒)는 둘째 아들 권오기, 만아(滿兒)는 세째 아들 권오직)
임신년(壬申年 : 1932년) 3월 정유삭(丁酉朔) 19일 을묘(乙卯)는 곧 죽은 아이의 대상일(大祥曰)이나 대상의 제례(祭禮)를 행할 수 없어 아비는 눈물을 머금은 채 붓을 잡고 평생의 회포를 서술하여 영원히 하직하는 말을 고하여 이르노라.
아! 원통하고 슬프도다! 내가 너와 인간세상에서 부자(父子)라는 이름으로 정해진 것이 겨우 삼십 삼년인데,이 삼십 삼년 사이에 부자의 정을 나눈 것이 어찌 일찍이 그 삼분의 일이라고 되었겠으며 노심초사한 기간을 제외하면 실로 십분의 일도 되지 않을 것이다. 천지간(天地間)에 부자가 된 자로서 누가 나와 너처럼 소원(疏遠)하게 산 자가 있겠는가? 소원(疏遠)하게 산 것은 그래도 친근할 날이 있을 것이란 소망이 있어서였는데 그 소원함이 너무 심하여 병이 들어도 병든 것을 알지 못하고 죽어도 그 죽음을 알지 못하였다. 병을 간호하고 의원에게 묻는 것은 사람으로서 반드시 할 일인데 나는 약 한 첩도 써볼 수 없었고 생사(生死)의 결별(訣別)은 인간의 도리에 있어서 가장 지극한 일임에도 너는 나에게 한마디의 말도 할 수가 없었으니 천하고금(天下古今)에 아비로서 혹 아들에게 곡(哭)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내가 너에게 곡하는 것처럼 절치부심하면서 슬픔이 골수에 사무쳐 오래될수록 더욱 깊어지는 자가 있겠는가!
네가 과연 죽었느냐? 죽었다면 병으로 죽었느냐? 병은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못할 것이니 충직(忠直) 때문에 죽었느냐? 사람의 삶은 올바름에 있는 것이니 네가 만약 죽을 자리에서 죽었다면 어찌하겠는가! 고문(拷問)으로 꺾이고 분질러짐을 당하던 날에도 죽지 않았고 고초(苦楚)를 직접 받으면서도 의지와 기개를 충실히 기르면서 평소와 다름없는 것같이 편안하게 2년, 3년 오랜 기간을 견뎌왔는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변을 당하였으니 네가 과연 병으로 죽었는가? 충직 때문에 죽었는가? 하늘이여! 하늘이여! 어찌 죄라고 하겠으며 어찌 허물이라고 하겠습니까! 원통하고 슬프도다!
더 읽어보기 ▼우리 집안이 대대로 번창하지 못하였고 나 또한 여러 번 실패하고서 오랫동안 바라던 나머지 네가 태어났던 것이다. 타고난 바탕이 과히 나쁘지 않고 미목(眉目)이 맑고 깔끔하며 생김새가 단정하고,어릴 적부터 말을 배울 때도 자못 영민하였다. 그때 집안의 여러 사람이 아버님께 수학(受學)하러 오는 이가 날마다 방에 가득 찼었다. 어린 너는 장난치면서 즐겁게 놀면서도 서책(書冊)을 가까이하기를 좋아하였고 반드시 책을 펴고 덮는 것을 흉내 내었으며, 붓과 벼루를 좋아하였고 글씨를 본받으면서 아침저녁으로 배우니 귀와 눈으로 익히는 데 도움이 없지 않았으니 그 재주가 진실로 가르칠만하였다. 아버님께서 일찍이 천(天), 지(地), 일(曰), 월(月), 부(父), 모(母), 자(子), 녀(女) 등의 글자로써 시험해보시니 문득 그 뜻을 캐묻고 그 자형(字形)을 모사(模寫)함에 있어서 많은 의외의 일을 드러내었다. 네가 글씨를 씀에 있어서는 획(劃)의 선후(先後)며 변과 방을 한 번 듣고서도 틀림이 없었고, 붓의 놀림이 민첩 신속하였으며 글을 읽음에 있어서는 음(音)과 토(吐)와 구두(句讀)를 띔이 또록또록하게 들렸다. 아버님께서는 네가 깊이 생각하지 않고 금방 쉽게 대답하는 것을 나무라셨지만 너는 그 취지를 대강 짐작하여 알았으므로 그 재주에 맡기시고 심한 꾸중이나 독려하지 않으셨다. 유하은(柳霞隱) 척숙(戚叔)께서 일찍이 아버님에게 다니러 오셨다가 너의 글 읽고 글씨 쓰는 것을 보시고는 크게 칭찬하여 말씀하시기를 “참으로 비범(非凡)하구나. 이 아이는 재주가 있으니 반드시 학문을 해야 할 것이고 명민(明敏)하니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며 형의 집에 글이 뿌리내려 비로소 크게 떨칠 것이다”라고 하셨다.
만득(晚得)으로 낳아 기른 탓으로 아버님께서는 매우 사랑하셨으며 우리 내외(內外) 또한 너에 대한 사랑은 어버이로서의 본연적(本然的) 사랑으로서 더욱 사랑하였다. 그러나 너는 그 사랑을 믿고 교만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남과 어울려 놀 때에는 반드시 너보다 나은 사람을 따라 놀았으며 일찍이 한 번도 너보다 못한 사람을 추종(追從)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의 미움을 사는 일이 없었다. 이어서 너의 두 동생이 차례로 태어남에 문족(門族)들이 모두 “군의 집이 외로웠던 분을 이제야 씻는구나.” 하였으며 나 또한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기대하면서 조상님들이 덕(德)과 인(仁)을 쌓으신 보람이 장차 여기에 발현(發現)되고 이후로 창성(昌盛)할 기반이 장차 이에서 시작될 것으로 믿었다. 나는 너를 가르치고 길러서 성취시킬 책임이 있음에 그 소임(所任)을 감당하지 못할까 두렵기도 하였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너의 타고난 바탕이 못나지 않았고 성장하면서도 어리석게 되지 않았으니 사랑스러웠다. 가르치지 않아도 능히 충직(忠直)하고 노력하지 않아도 능히 청렴하고 검약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집의 예사로운 일이었다. 나는 또 살림살이에 밝지 못하여 위로는 가난한 가운데 부모를 봉양(奉養)하는 일과 아래로는 자식을 양육(養育)하는 일에 오직 네 어미의 내조(內助)에 힘입었으니 옷은 항상 너에게 추위를 근심하게 하였고 밥은 매양 배고픔의 한(恨)이 많게 하였다. 내가 항상 너에게 “배부르게 먹고 따스한 옷 입는 것이 남들만 못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 너는 반드시 내가 말하는 뜻을 잘 알아들었다. 권장하고 인도하여 날마다 성장하기를 바라면서 세상사는 재미를 보고자 하였으며 너로 하여금 일찍 장가들게 한 것 역시 늙으신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그 단조로운 생각이 독장수가 셈하는 꾀와 같아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런데 세상이 바야흐로 뒤집혀서 그 어수선함이 날로 심해지고 큰 파란이 밀어닥치니 대세(大勢)를 누가 막겠느냐? 부득이 시속(時俗)에 따라 처신하고 공부하지 않을 수 없기에 가숙(家塾)을 시작하여 신구학문(新舊學文)을 반반씩 가르치다가 끝내는 동화학교(東華學校)로 옮겨 합병(合併)하였다. 날마다 십리 길을 일찍 등교했다가 늦게 귀가하였지만 비바람과 춥고 덥기 때문에 학업을 빠뜨리거나 지각하지 않았으며,살을 에는 듯한 주위와 배고픔을 마음에 두거나 얼굴색에 드러내지 않고 굳게 마음에 새겨 한결같이 힘쓰면서 학칙(學則)을 준행(遵行)함이 3년 동안을 하루같이 하였다. 총명하게 기술하는 성품과 시종 게으르지 않고 정성껏 힘쓰는데 대하여 동창(同窓), 제우(諸友), 교수(敎授) 제위(諸位)가 여러 번 나에게 칭송하였다.
너는 졸업한 뒤에 상급학교로 진학하려고 했으나 힘이 마음을 따르지 못하여 너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였다. 하루는 네가 나에게 대구로 유학하고 싶다고 했는데 내가 자력으로 학자금을 마련할 수 없음에도 차마 굳이 말리지 못하였다. 네가 떠난 지 수개월이 되는 동안에 계속 오가는 편지로써 번번이 돌아오기를 재촉했지만 여관비가 쌓였으니 어찌하겠는가? 다행히 경주의 최준(崔俊) 형이 한 번 보고서 그 재주를 아깝게 여겨 부채를 상환하고 곧 불러다가 고등학교에 입학시키고 학비를 담당한다는 편지를 받고서는 다행으로 여기고 그 기쁨이 뛸듯하여 마음속으로 어진 주인을 만났다고 치하(致賀)하였다. 그런데 그 약속이 얼마나 굳은 것이었던지 그 사이에 이간하는 자가 끼어들어 틈을 냄에 사람으로서 자발(自發)한 양심을 거스르고 사람이 나아갈 앞길을 빼앗아 중도에서 길을 바꾸게 하고 누대(樓臺)에 오르려는 사람의 사다리를 떼어버렸다. 부득이 물러나와 다까하시(高喬亨) 선생에게 말하니 다까하시 선생은 개탄하면서 말하기를 “자네가 퇴학한다면 학교가 학교답게 되겠는가?”하면서 몸소 주변에서 사람을 찾아 달성(達城)에 사는 서군(徐君)에게 부탁하여 학업을 마치게 하였다. 아! 다까하시 선생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고 또한 오래 알아둘 만한 사람도 아니며 다만 일시적인 교수(敎授)일 뿐인데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그의 사람을 사랑하고 성공을 좋아하는 공리심(功利心)이 우리들 선비와는 특별히 다름을 알 수 있었다. 아! 내가 힘이 없어서 아비로서 자식을 교육하는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너로 하여금 사회에 출발하는 초기부터 짠맛,신맛을 모두 맛보게 하였으니 소경이 개천 나무라기로 어느 여가에 원망인들 하겠는가? 고난(苦難)을 겪지 않으면 격발(激發)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가 너를 면려(勉勵)한 바이며 고난(苦難)이 복(福)의 근원이 된다고 한 것이 네가 나를 위로한 바였다. 조각배가 큰 나 루에서 모두 빠지려는 대중을 건너게 하고 작은 힘으로 황하의 넘치는 탁류에서 구하려 하였다. 먼저 알고서 뒷사람을 깨우치게 하였으니 공상자(空桑子, 은나라의 유명한 재상 이윤伊尹을 말함)가 아니고 그 누구이며 먼저 근심을 하고 나중에 즐거워함은 범희문(范希文, 범희문은 송 나라의 명 재상 범중엄范仲淹을 말함. 희문은 그의 자.)이 없으니 누구와 더불어 돌아갈 것인가?
전남(全南) 광양(光陽)에서 일년 있는 동안에 비록 오오쯔까(大塚) 선생을 만나서 알게 되었지만 뜻한 바가 아니었기에 마침내 그 길에서 되돌아오기를 결심하였다. 풍서(豊西)에 학교를 다시 열고 교원을 초빙하여 창설하고 인재를 모아 교육함에 한 지방의 명예를 크게 얻었으며 이들을 계도하고밝게이해시켜서 오직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는데 마음을 다하였다. 약간의 월급도 사사로운 일에 쓰지 않았고 학비를 대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두루 도와주고 지필(紙筆)을 갖출 수 없는 자가 있으면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니 이럼으로써 도처의 학도들이 마음으로부터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그것은 마땅히 거친 체험으로써 잘 미루어 헤아렸기 때문이다. 간혹 단점이 있다는 것은 재물과 이익에 지나치게 담박한 것이라 할 것이니 이것은 지금 세상 사람으로서 생업(生業)으로 삼을 것이 아니다.
내 또한 일찍이 “살아가는 계책 때문에 너의 마음을 더럽히지 말라.”고 하였고 너는 매양 말하기를 “제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런 마음이 있는 것이며 만약 부유(富裕)하였다면 이런 마음이나마 지니고 있겠습니까? 빈궁함을 탓하지 마소서. 지금 초췌하고 극심한 고통을 겪는 것이 어찌 다만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이 제자리를 얻지 못한 것뿐이겠습니까? 비록 진초(秦楚)의 부(富)라도 저는 저의 의(義)에 따라 살 것이며 무릇 지금 사람으로서야 그 어찌 좋아질 수 있겠습니까마는 조만간에 부모를 위할 날이 어찌 없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때 다행히 손자를 보게 되어 집안의 경사(慶事)가 천금(千金)의 보배를 얻은 것보다 더하였는데 하늘이 나에게 복을 주지 아니하여 갑자기 죽고 말았다.
너의 두 아우가 동경(東京)에 고학(苦學)하러 갔으니 이것을 어찌 내가 차마 시켰을까마는 너는 좋아서 권하였는데 겨우 일년 만에 예전에 없는 지진(地震)의 재난(災難)이 일어나고 무고(無辜)한 사람을 독살(毒殺)한다는 풍문(風聞)이 사방에서 들꿇었다. 가고 싶어도 길이 막혔고 묻고자 하여도 우편이 끊기어 너도 또한 그 아우들이 꼭 죽은 줄로 추측하였고 나 또한 그들이 살아서 온전할 가망이 없다고 하였으니 이때에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 한 실상은 오직 내가 알고 네가 알 뿐으로 어찌 감히 무병자(無病者)를 향하여 그 아픔을 말하겠는가? 만사일생(萬死一生)의 위난(危難) 중에서 다행히 살아서 돌아왔으니 까닭 없이 사지(死地)에 몰아넣은 것은 나이고 사지(死地)에 빠진 것올 살려낸 것은 하늘이다. 부자 형제가 같이 모여 경사(慶事)를 함께 하였으나 우리 집의 하늘 역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모두 너희들이 불능(不能)한 바를 증익(增益)되게 한 것이다.
일찍이 말하기를 “천하의 허다한 일반적인 사물(事物)은 모두 천하의 허다한 일반적안 사실(事實)에서부터 비롯되며 모두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바이니 사물(事物)의 자아(自我)라는 것은 사실(事實)의 당위(當爲)인 것이다. 괴롭고 즐겁고 달고 쓴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마땅히 자신의 힘을 다하여 자신의 몸을 세울 뿐이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가히 타인에게 의지하고 기댈 수 있겠는가? 매양 열국(列國)의 위인들이 흥폐를 도모하고 명신(名臣), 지사(志士)가 보국(報國)함에 있어서 공훈을 세우는 등의 역사를 개연(慨然)히 여기고 사랑하며 완상하고 흠모하였다. 저것은 어떻고 이것은 어떻다고 한다면 이것은 기어서 우물에 들어가려는 어린애는 어린애의로 잘못이 아님과 같으니 진실로 차마 하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이 있는 자가 가만히 보기만 하고 그를 구제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익을 즐기고 염치를 버린 채 도도히 혼란한 세상은 계속되는데 피가 끓어오르고 울음을 삼키면서 늠름하게 나라를 생각하며 의논하는 것이 어찌 능수(陵水)의 행인(行人)이라도 호구지책(糊口之策)만을 하고 있겠으며 맥구(麥邱)의 노인인들(맥구는 중국 제나라의 지명. 제나라 환공이 맥구의 늙은이에게 나이를 물으니 83세라. 훌륭하다고 칭찬하고 장수의 비결을 가르쳐 달라 하니 금옥을 귀하게 여기지 말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라 깨우쳤다 함 ) 어찌 오로지 자신의 몸만을 도모하는 계획을 쓰겠는가?
이때 만아(滿兒)는 곧 오직(五稷)인데 너를 따라 서울에서 노닐었는데 생소한 곳에서 적숙공권(赤手空拳)이라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음에 간다는 말도 없이 멀리 러시아로 떠났으며 선아(瑄兒) 곧 오기(五夔)인데 외사촌 종우(宗佑)군을 따라 대구의 상점(商店: 무영백화점)에 머물고 있었다. 그리하여 오직 나 홀로 옛집을 지키면서 쓸데없이 심신(心身)을 허비하였는데 바로 이즈음에 선아(瑄兒)가 엽서를 보내왔는데 달리 안부도 없이 큰 화(禍)가 앞에 닥친 것 같다는 것이었으니 그 연유(緣由)나 별다른 까닭을 알지 못했으나 가슴이 두근거리고 눈앞이 캄캄하였다. 즉시 전보를 지고 갔더니 다른 사고가 아니라 네가 구속되는 것을 보았다는 기별을 들었다는 것이었으며 이는 곧 병인년(丙寅年: 1926년) 4월 28일이었다. 그는 안색(顔色)이 없이 나를 향해 근심스러워하였고 나 또한 그를 대하여 우두커니 바라보며 말이 없다가 한참 만에 스스로 마음을 안정시키고 말하기를 “명성이 높이 드러나면 오래 살기 어렵다는 이 말은 고인 (古人)의 세상 살아가는 계명(戒銘)이고, 둥근 구멍을 생각하지 않고 모난 자루를 맞추려고 한다는 이 말은 선현(先賢)들이 시대를 한탄한 경구(警句)이다. 너는 너의 형을 알지 못하느냐? 본디 품은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행함에 두려울 것이 무엇이겠으며 또 푸른 하늘이 위에 있으니 죄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였다. 그는 곧바로 상경(上京)하려고 하였지만 나는 말하기를 “방금 불같은 경계망이 펼쳐져서 매우 긴박한 가운데 있으니 간들 어떻게 손써볼 수 있겠느냐.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아직은 마음을 느긋이 하고 천천히 기다리면서 신문을 보고 그 형편을 자세히 살펴본 뒤에 가는 것이 좋을 듯하니 조심하고 너무 조급히 서둘지 말라.”고 하였다. 이렇게 상의하고 나는 즉시 차를 돌려 허둥지둥 정신없이 집으로 향했는데 날은 저물고 길은 먼지라 이것이 인간의 어느 세상인가 싶었다. 그 뒤 며칠이 못되어 너의 여러 해 만의 편지를 받았는데 답서(答書)를 하려고 해도 무슨 말을 쓰겠는가? 다만 평소에 환란(患亂)을 겪은 것으로써 현재의 환란(患亂)을 이겨내는 길에 힘쓰라고 할 뿐이었다. 선아(瑄兒)는 또 의논한 바와 같이 서울로 올라가서 형제가 상면(相面)한 것을 매우 상세히 알려왔는데 동회(東會)와 서사(西社) 사이에서 마음을 초조히 하고 남산(南山)과 북악(北岳)의 산마루에서 피눈물을 흘렸으며 아뢰려고 해도 알아줄 하늘이 없고 호소하려고 해도 들어줄 땅이 없었으니 세상에서 누가 그 마음을 알겠는가? 사람은 그 뱃속을 헤쳐보기 어려우니 땅에는 사람을 낚아 함정에 빠뜨리고 제 이익을 취하려는 무리로 가득하니 어찌 함정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굴러 내리는 자가 없다고 하겠는가? 이때의 선아(瑄兒)의 마음을 나는 헤아려 알 수 있었다. 바야흐로 그 엄한 문초(問招)와 혹독한 매질을 당하는 자리에서 만약 위세(威勢)를 두려워하여 명령에 복종하고 마음을 굽혀 구차하게 곤경을 면하려고 하였다면 몰래 사나움을 감춘 승냥이의 어금니도 오히려 멈추었을 것이고 가만히 내뿜는 살모사의 독(毒)도 또한 쉬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아홉 번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겠다는 그 초심(初心)은 차라리 몸이 해체(解體)되는 한이 있더라도 변하지 않고 굳게 지켰던 것이다. 그러기에 저들은 위력(威力)을 함부로 행사하고 독수(毒手)를 마구 써서 수족(手足)을 묶고 단근질을 하며 꺾고 비틀면서 이기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듯하였으니 어찌 기운이 빠지지 않을 수 있으며 목숨이 끊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처럼 사리에 어둡고 미련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또한 오히려 넋이 달아나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의사를 불러 진찰하니 다행히 다시 소생할 수 있었다. 하늘이여 하늘은 혹시 굽어 살폈나이까? 전국의 사우(社友)는 간담이 찢어졌고 해외(海外)의 변호인(辯護人)도 혀를 내둘렀으며 동서양(東西洋)에 처음 있는 가장 큰 공적사건(公的事件)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사건이 거의 일년이나 오래 끌었으니 그동안의 고초를 내가 하나하나 다 알 수 없으며 너도 무슨 마음으로 들려주려고 하였겠느냐? 그 이듬해에 사건이 결정되었는데 5년 징역이었다. 어찌할 수가 없어 오직 세월이 가기만을 재촉하였다. 금석(金石)이 아닌 체질(體質)을 가지고 방칫돌 밑에 깔려서도 몸을 보전함은 날카로운 칼날이라도 밟고 갈 수 있다는 일편단심(一片丹心)이 아니었겠느냐? 오직 이렇게 믿지마는 너는 본디 허약한 증상이 있으니 겨울 추위와 여름 더위가 더욱 심할 때에 는 언제나 병이라도 날까 하여 근심스러웠는데 너는 편지할 때마다 항상 심려하지 말라고 하였다. 비록 염려하지 않으려 한다고 하여 그렇게 되겠느냐? 좋은 날이나 명절에 사방 이웃에서 노래와 웃음소리가 집집마다 떠들썩하게 들리면 나는 귀를 막아 가리고자 하였고 백설(白雪) 같은 떡, 구슬 알 같은 쌀밥이며 사철의 맛좋은 음식이 반위에 올라도 나는 목구멍으로 내려가지 않았으며 구곡(九曲)의 연한 창자가 마치 녹을 듯하여도 오히려 강건(强健)한 척한 것이 네 아비였느니라.
이 해 9월 20일 네가 선아(瑄兒)에게 편지하여 말하기를 “다음달 초하룻날은 어머님의 회갑생신(回甲生辰)이다. 불초(不肖)한 형이 집에 있지 않다고 하여 그냥 헛되게 넘기지 말고 간략하게나마 음식을 갖추어서 숙부(叔父)님들과 숙모(叔母)님들을 초청하여 하루를 즐겁게 해 드리기 바란다. 내가 비록 여기에 있지만 멀리서나마 끝없는 장수(長壽)를 빌어드리겠다.”하였는데 너의 어머니는 편지를 보고 울면서 말하기를 “네가 옥중(獄中)에 있으니 즐거울 수 없을 것이며 나 또한 누구와 즐거워하겠는가?”하였다. 마침 순칠(舜七: 오설의 외척 유기영의 字)이 왔다가 돌아갔으며 나는 홀로 무료하게 그날을 보냈는데 너 또한 반드시 홀로 서러운 감회에 젖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또 그 이듬해는 나의 갑일(甲曰)이었는데 편지로 부탁함이 또한 전과 같기에 안으로 모자(母子)가 상의(相議)하기를 번번이 편지로 부탁하는 것이니 끝내 저버릴 수 없다 하였으며 나 역시 생각건대 시하(侍下)에 있으면서(계모 정씨가 생존하였음) 한결 같은 고집으로 굳이 말릴 수 없었고 여러 인척(姻戚)들 집에서 보내온 음식물 또한 경비를 들여 새로 장만하지 않더라도 넉넉하다고 할 만하였다. 기왕에 혼자 먹을 수 없기에 이웃의 벗들과 족친(族親)들을 청하여 함께 먹으며 즐겼는데 모두 네가 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네가 있어서 잔치를 크게 베풀었더라도 오히려 생일을 맞아 들아가신 부모를 추모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을 것인데 하물며 즐겁지 않으면서 억지로 노래하는 것인지라 이 경우는 아픈 마음의 쓰라림 때문에 부모들 추모하는 슬픔은 느껴볼 겨를도 없었다. 네가 출옥하여 돌아오는 날을 기다려 잔치를 마련하고 즐거운 마음을 곱씹으면서 한 번 즐겨보려 하였는데 하늘이여! 하늘이여! 부자의 정을 앗아감이 어찌 이토록 극단에 이르게 하십니까? 원통하고 슬프도다.
빈부(貧富)의 문하(門下)에서 사귄 손들의 정이 달라서 손끝을 뒤집듯하고 풍우(風雨)가 변태(變態)하듯 하며 남의 불행을 보고 좋아하는 사람은 전면(面前)에서는 칭찬하면서도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면서 화재(火災)를 구제(救濟)한다는 자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잘난 아들이 있으니 그대는 무슨 근심이 있으며 아들이 공산주의운동을 하고 있으니 그대는 살 길이 있는데 무엇을 남에게 구하고 무엇 때문에 가난함을 걱정하는가?”하고 핀잔하였다. 내 비록 글을 알아듣는 귀는 없지마는 어찌 말을 듣는 귀야 없겠는가? 살갗을 갈라놓고 소금을 뿌리듯 어찌 이처럼 악독(惡毒)할 수 있는가! 입을 다물고 달게 받아들이며 아픔을 참고 뼈에 새기면서 감히 남에게 말을 하지 못하였으나 장차 부자(父子)가 서로 만나는 날에 그들을 향하여 일장설파(一場說破)하고 일소(一笑)에 부치려고 다짐했는데 이제는 모두 글렀구나. 사람들이 나의 불행을 보고 좋아했던 것이 가히 적중(適中)한 것이라 하겠으며 심장과 머리에 쇠못을 박는 것보다 통한(痛恨)이 더욱 격렬하니 지금 너에게 말하지 않고 다시 누구와 더불어 말하겠는가?
원통하도다! 기사년(己已年: 1929년) 섣달그믐 쯤 너의 편지에 “지금부터 190여일 지나면 不肖는 마땅히 귀가(歸家)하여 뫼시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 또한 마음속으로 기뻤지만 오랫동안 구속된 생활을 한 나머지 조급한 생각으로 빚어지는 해(害)가 있을까 두려워서 답장으로써 “백리(百里)를 가는 자는 구십리(九十里)를 반(半)으로 삼는 것이니 마음을 급하게 먹지 말고 날짜가 한정되어 있으니 저절로 감해져서 줄어질 것이므로 원컨대 평소와 같이 마음을 편하게 가져라.”고 했던 것이다. 나 또한 암산(暗算)하여 보니 당초에 햇수를 계산했을 때는 족히 2,800여일 이나 되어 오히려 망망(茫茫)하였는데 이제 일수(日數)를 헤아려보니 날이 가고 달이 줄어들어 얼마 남지 아니하였다. 또 봄이 장차 돌아오면 천지(天地)에 화기(和氣)가 펼쳐질 것이고 오는 여름의 혹서를 평온하게 지나면 두렵게 생각할 날은 따라서 면할 수 있을 것이며 닥쳐오는 한겨울은 다시 걱정할 것이 없었다. 하루 이틀 손꼽아 기다렸는데 또 뜻밖의 일이 생겼다. 정월 28일에 만아(滿兒)가 러시아에서 학업을 마치고 돌아와서 구속되었다는 것을 신문에서 처음 보고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이며, 그다음에 그가 보낸 편지를 보아도 과연 그러하였다. 남은 혼이 다시 놀람에 어찌 심정을 진정하겠는가? 선아(瑄兒)는 이때까지 대구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 소문을 듣고 곧바로 상경(上京)하여 상면(相面)한 후에 곧 편지로써 이르기를 “형님의 형모(形貌)가 환골탈태(換骨奪胎)하듯 전일(前日)과는 크게 다릅니다. 형님은 비록 병이라 하지마는 대단한 것이 아니며 여기서도 치료할 길이 있으니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또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병이 가볍지는 않은 것 같으니 조금은 걱정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 듣고 보니 비록 놀랍고 염려스러웠지만 측은할 뿐 손을 쓸 수가 없었다. 평소의 병을 묵혀 버려두어서 허(虛)한 틈을 타고서 갑자기 발병(發病)한 것일까? 이미 이르기를 병을 치료할 마땅한 곳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들에게 어찌하여 짐독(鴆毒, 짐새의 깃에 있다는 맹독)으로 사람을 죽인 양숙자(羊叔子, 서진西晉의 장수 양호羊祜의 자. 오나라 장수 육항陸抗이 중병에 걸리자 양호가 약을 보냈는데, 부하들이 모두 의심했으나 육항은 양호를 믿고 짐새의 독이 든 약을 먹고 죽었다)가 있었을까? 하늘을 바라보고 마음으로 빌었으며 날마다 병이 나았다는 기별을 바랐는데 3월 23일(양력 4월 21일) 문득 전보가 날아들었으니 흉음(凶音)을 알리는 것이었다. 하늘인가 땅인가! 귀신인가 사람인가! 시대(時代)의 탓인가 운명(運命)의 탓인가! 꿈인가 생시(生時)인가! 땅을 치고 하늘에 부르짖어도 망망(茫茫)하고 참담하기만 하였다. 여비(旅費)에 구애되어 즉시 출발하지 못하고 그 이튿날 일찍 출발하였는데 종군(宗君) 문현(文顯)이 수행하였으며 그의 부축을 받으며 서쪽으로 향하여 걸어가니 마치 술에 취한 것 같았고 미친 것과도 같았다. 살아서 서로 만나지 못하였는데 죽은 뒤에 누구를 만나려고 허둥지둥 이렇게 가고 있는 것일까!
기차에 이르렀는데 차중(車中)에서 너와 마음으로 통하는 벗을 뜻밖에 만나 손을 잡고 피눈물을 흘리며 술과 음식으로써 나를 위로하고 일마다 앞을 인도하여 나로 하여금 창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거리는 중에도 넘어지고 자빠지지 않게 한 것은 모두 이 사람의 덕택이었다,밤에 남대문 앞에 다다르니 밤은 이미 깊었다. 여관에 투숙하고 이튿날 아침에 일찍 당지(當地)에 갔더니 소위 형무소의 문 밖이었으며 경위를 물으니 일은 이미 치상(治喪)하여 나갔으나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형무소의 문을 바라보니 당장 머리를 박아 부수어 피눈물을 쏟으면서 흔쾌히 한 번 죽어지고 싶었으나 또한 산 사람도 그 안에 있는지라 굳이 참고 머리를 돌려 무거운 발길을 옮겼지만 어느 곳에 누구를 따라갈 것인가? 길을 끼고 좌우에는 모두 사식점(私食店)이었는데 한 노파에게 물었더니 그 노파는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하기를 “그 사람이라… 그 사람 참으로 장합니다. 그 사람은 어제 동생이라는 사람이 들것에 담아서 나갔습니다.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발을 동동 구르는 형상이랑,땅에 엎드려 애통해 하는 모습을 이 거리에서 본 사람은 전을 거두고 눈물을 뿌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가 간 곳이 필시 신간회(新幹會)일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비로소 선아(瑄兒)가 먼저 와서 시신(屍身)을 수렴(收殮)한 것을 알게 되었으니 망연자실(茫然自失)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던 중에서도 오히려 조금은 마음이 놓이는 듯하였다. 즉시 신간회(新幹會)로 갔더니 선아(瑄兒)는 이미 사우(社友)들과 더불어 대렴(大殮)을 마쳤으며 시신(屍身)을 갈무리할 널과 반장(返葬)할 계획까지 이미 정해 놓았다. 관(棺)을 어루만지면서 한 차례 통곡을 하고 선아(瑄兒)의 말을 들으니 “이미 17일(양력 4월 15일) 급하다는 전보를 받고 즉시 달려와서 18일 형님이 계시는 곳으로 달려갔더니 이미 숨이 끊어지려 하고 정신을 잃은 것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형님! 형님!’ 하고 부르면서 저를 아시겠습니까? 하였더니 이에 눈을 뜨시고 말하기를 “내 아우가 왔느냐? 내가 내 동생을 어찌 모르겠느냐?” 하였습니다. 곧 두 손으로 목을 껴안고 볼을 비비면서 형님은 저를 껴안고 저는 형님을 껴안았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해도 말에 앞서 이가 갈렸으며 이를 갈고 다시 말을 하려고 해도 문득 울분이 격해져서 말은 끝내 할 수가 없고 분격한 주먹으로 땅을 치며 이를 갈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형님께서는 ‘아우야 오늘 밤은 나와 같이 자자’고 하였으니 이는 곧 형제간이 생사(生死)의 즈음에서 결별한 처지인데 승냥이의 마음이요 이리의 성질이지 저들이 어찌 사람이라고 할지 함께 외박(外泊)하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눈물을 감추고 나와서 자고 아침에 들어가니 이미 형님은 운명(殞命)하였으며 이에 말하기를 ‘살아서 내보내지 않음은 法이라 하더라도 죽어도 또한 내보냄을 허락하지 않겠느냐? 산에 묻게 할 것인가? 형무소에 빈소를 마련하게 할 것인가?’ 하였더니 저들은 말하기를 ‘산은 갑자기 허락할 수가 없고 형무소는 더욱 불가하다.’ 바야흐로 분을 머금고 있던 나머지 치솟는 격분과 분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이에 실성(失性)하여 울부짖고 흥분하여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희들은 개나 돼지만도 못하다. 산도 안 되고 형무소도 안 된다면 시신(屍身)을 등에 지고 종로(鐘路) 거리를 돌아다닐 것이다.’ 하였습니다. 저들도 또한 사람인지라 둘러서서 듣고는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습니다. 이에 말하기를 ‘그러면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하였는데 신간회(新幹會)로 가겠다고 하였더니 그들은 말하기를 ‘빈소(殯所)를 마련할 만한 빈 방이 있느냐?’ 하기에 있다고 하니 ‘그러면 가라.’고 하여 비로소 여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고 전후좌우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신간회(新幹會)의 여러 친우(親友)들이 면면이 와서 조문(弔問)을하며 너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고 세상을 위하여 피눈물을 쏟는 사람도 있었으며 나를 위하여 눈물을 거두는 사람도 있었다. 말하기를 “저희들도 또한 모두 일찍이 수형생활(受刑生活)을 겪은 것이 3, 4년 혹은 6, 7년이며 구차스럽게 죽음을 면하고 다행히 살았으나 모두 이 형에 대한 죄인입니다. 이제 이 형은 죽을 곳에서 죽었습니다. 원컨대 부자의 사사로운 정으로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하면서 나에게 깊이 사례하고 빈소에 후의(厚誼)를 베풀었으며 도로(道路)에 버리지 않은 것이 다행스러웠다.
나는 하룻밤을 묵고 먼저 떠났으며 선아(瑄兒)와 종군(宗君)은 너를 싣고 뒤에 출발하였다. 그날은 저물어서 집에 도착했는데 곧 23일이었다. 원통하고 슬프도다! 네가 말한 바의 앞으로의 기간 190일은 이제 앞으로 남은 날짜가 100일도 되지 않는데 이 무슨 행색(行色)인가! 살아서 10년 동안 네가 돌아오기를 바란 것은 어찌 그토록 더디었으며 죽어서 하루 만에 상여에 실려감은 어찌 그토록 빠르단 말인가! 10년 동안 고대(苦待)하며 바라던 마음으로써 이 하루 만에 실려 오는 빠른 상여차를 맞이하니 앞이 캄캄하고 아득하였다. 하나의 나무토막처럼 넘어진 시체이니 네가 참아 할 짓이며 내가 바란 일이겠는가!
하늘이여! 하늘이여! 이 어찌 차마 할 짓입니까? 칠순(七旬)의 조모(祖母)께서 부여잡고 불러 봐도 응답이 없고 갑절로 사랑하는 자애(慈愛)로운 어미가 절규(絶叫)하며 불러도 들음이 없으며 우러러 바라보는 너의 아내가 자절(自絶)하려 하여도 돌아보지 않는가? 네가 무척이나 사랑했던 자는 질녀(姪女) 임(任)인데 그가 비록 얼굴은 알지 못하지만 언제나 백부(伯父)가 돌아오실 기일을 물었으며 백부(伯父)는 어디로 돌아가시느냐고 목이 메도록 울부짖어도 너는 어찌 가여워하지 않았던가? 숙부(叔父)들과 숙모(叔母)들,온 문중(門中)이 함께 슬퍼하여도 알지 못하니 이 어찌 네가 날짜를 손꼽으며 돌아와서 모시겠다던 마음이며 무심함이 어이 이 같단 말인가! 이튿날 새벽이 밝을 무렵 수의가 대략 갖추어져서 장차 반함(飯含)과 대렴(大殮)을 고쳐 하려고 관(棺) 뚜껑을 열어보니 단정한 모습은 변함이 없이 잠자는 듯하였으며 금니도 번쩍번쩍하였다. 고문(拷問)한 흔적은 푸릇푸릇한 검은 점을 이루었으니 이 모두가 독(毒)을 쏜 자국이었다. 내 비록 목석(木石)이라 할지라도 무슨 마음으로 차마 네 몸에 손을 대고 싶었겠느냐마는 나는 내 손으로 너의 입에 반함(飯含)을 하고 너의 시신을 염하였다. 다음에 입관(入棺)하려고 목수에게 관(棺)을 만들게 하는데 이를 엄금(嚴禁)하니 저들은 어찌하여 쇠사슬을 펴고 그물을 치듯 속속들이 경계(警戒)하였으며 죽어도 오히려 뉘우치지 않을 것처럼 사방에 가시를 무너뜨려 놓고 손님의 출입을 금지하고 예(禮)에 따라 장사(葬事)를 치르게 하지 못하게 하였을까? 관(棺)은 서울에서 서푼(三分) 송판(松板)으로 만들었고 외관(外棺)은 함석으로 납땜을 하여 시취(屍臭)가 풍기지 않게 하였는데(일제는 고문의 흔적을 은폐하기 위해 철제를 납땜하였는데, 권오설 선생의 아버지는 시취를 막기 위해서라고 하고 있음. 의도적인 기술로 추정됨 - 편집자주) 처음의 그 관(棺)을 쓰게 하였으며 공동묘지(共同墓地)에 장사하되 봉분(封墳)을 짓지 말고 평장(平葬)으로 하게 하였으며 외래조객(外來弔客)을 일체 엄금하였다. 내가 강직한 사람이 못될 뿐 아 니라 그로 인하여 부랴부랴 관(棺)을 묻어둔 채 1년, 2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부자(父子)의 정에 따른 일을 펴지 못하였다. 하늘이여! 하늘이여! 이 어찌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원통하고 슬프도다! 너의 밝은 혼령은 나를 따라왔느냐? 마루에 있느냐? 뜰에 있느냐? 오로지 형식(形式)만 티끌 세상에 부쳐두고 몸을 깨끗이 하여 어느 높은 곳으로 갔느냐? 마침 봄의 화창함을 만나 만물과 함께 변화(變化)하였느냐? 우뢰가 되고 천둥이 되어 원한과 노여움을 펼치려느냐? 온화한 바람이 되고 단비가 되어 못 물로써 광야로 흘러내리려느냐? 배가 되고 노가 되어 많은 사람을 건너게 하려느냐? 진(秦)나라를 물리친 고사(高士) 노중달(魯仲達)을 만나고 대나무 위 높은 곳의 봉황이 되려느냐? 송나라 원수를 갚은 문천상(文天祥)의 충혼(忠魂)과 인사하고 땅에 뿌리박지 않은 꽃다운 난초를 그리려느냐? 희생적(犠牲的)이고 영생적(永生的)임이 곧 너의 마음이니 옥(玉)으로서 부서질지언정 온전한 질그릇이 되지 않으려 하였고 차라리 난초로서 꺾일지언정 쑥으로서 무성하지 않으려 한 것이 곧 너의 뜻이었다. 그러기에 전날 밤 꿈에 나에게 웃음을 머금고 나에게 고하고 죽어서 땅속으로 들어갔으니 어찌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때때로 신문지상에 너를 아는 벗들이나 여러 사람들의 애도하고 애석해 하는 말을 보아 그것이 너를 송축(頌祝)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사람도 없지 않으니 입에 재갈을 물리고 혀를 묶는다고 하여 누가 감히 말하지 않겠느냐? 하물며 네가 보국구민(報國救民)에 급급(汲汲)했던 피나는 정성을 여러 문자(文字)로 등재(騰載)된 것을 찾아 모으면 수레에 실을 만큼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니 그것은 후일에 역사의 자료가 될 것이며 하늘의 뜻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동서양(東西洋)에 사회(社會)가 없다면 그만이지만 만약에 있다면 그것은 능히 대서특필(大書特筆)로써 선구자(先驅者) 누구라 할 것이며 그리하여 너는 영원히 살아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장차 눈을 높은 곳에 달아두고 그것을 기다릴 것이다.
원통하고 슬프도다! 남녀 사이에 부부(夫婦)의 낙(樂)은 사람으로서 크나큰 소원인데 아! 가엽게도 네 아내는 우리 문중(門中)에 들어온 시초(始初)부터 일찍이 하루라도 금슬(琴瑟)의 낙(樂)을 즐겨 보았을까? 만약 전에 잃어버린 아이를 잘 보육하였으면 이미 성장하였을 것이며 그렇게 되었더라면 너 또한 의탁할 곳이 있을 것이고 네 아내 또한 따를 곳이 있을 것이며 나 또한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 또 형제가 무고(無故)함도 인간의 한 가지 낙(樂)인데 선아(瑄兒)는 네가 죽은 이래로 분이 치솟아 정을 붙이지 못하여 집에 있어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밖에 나가도 마음에 맞는 일이 적으며 행오(行伍)를 잃은 찬 하늘의 기러기처럼 슬피 울고 무거운 짐을 진 약한 말처럼 이겨내기 어려우니 마음에 스치고 눈에 띄는 것마다 창자를 가르고 마음에 불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한 가지도 없다. 눈앞에 벌어진 일의 형세(形勢)가 마치 놀란 파도와 거센 물결 위에서 노를 가벼운 쪽배가 닿아서 쉴 언덕이 없는 것 같건만 백번을 생각해도 죄는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여! 하늘이여! 원통하고 슬프구나! 어느 사이에 일년이 지나고 또 일년이 되는구나. 장례,우제(虞祭),부사(祔祀), 소대상(小大祥)과 담제(禫祭)의 예(禮)를 한 가지도 예(例)에 따라 못하였고 기왕에 예(禮)에 맞게 못하였으니 변칙적으로 줄인 범절이 또한 어찌 예절(禮節)답게 할 수 있었겠느냐? 참췌(斬衰)의 복을 차마 기일이 지나도록 오래 몸에 걸치고 싶지 않아 부득이 벗기로 결심하였지만 아직까지 한 쪽에 두면서 너를 다시 양례(襄禮)를 잘 치르는 후일을 기다려서 우제(虞祭)며 부사(祔祀) 및 담제(禫祭)를 행하고 너에게 고하고서 복(服)을 벗으려고 한 것이다. 이것도 예에 없는 예인지라 반드시 큰 꾸짖음을 면할 수 없을 것인데 너는 또 이렇게 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위고(危苦)를 행하고 번거로운 욕도 피하지 않는 것이 덕이라는 말이 없지 않으니 비애(悲哀)를 주로 삼은 것이다. 위로 집에 있으면서 학업에 종사한 고생은 그만두고라도 아래로 네가 구속되기 전 3,4년에서부터 금일에 이르기까지 나는 너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며 너도 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끝내 서로 만나지 못한 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네가 나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어찌 끝이 있겠으며 나도 너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가슴속에 가득하다. 네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다음날 구천(九泉)에서 서로 만나는 날을 기다려 다오. 나는 이제 마음이 날로 약해지고 기운도 날로 줄어드니 이 세상에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으며 너와 더불어 서로 회포를 펼 날도 반드시 멀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도 마음이 아프고 붓이 더듬거려 간략히 만분의 일을 서술하면서 너에게 고하는 것이니 이것이 곧 유명(幽明)의 사이에서 부자간(父子間)의 영결(永訣)의 말이로다. 너는 혹 이 말을 듣고 나의 마음을 알려는가? 원통하고 슬프도다! 상향.
[원문은 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