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자료실

처음 입는 광복 (빙그레, 국가보훈부)

권오설 선생의 유적 - 철제관

훈장증

권오설 선생, 권오상 선생의 생가

권오설 선생, 권오상 선생의 묘

권오설 선생 풍산소작인회 활동지

권오설 선생 기적비 (가일마을 입구)

이곳은 일찍 민족해방투쟁의 가시밭길을 치달린 초인(超人)이 태어난 자리. 고귀(高貴)한 목숨을 바쳐 반제국권면복(反帝國權回復)의 횃불을 치켜든 애국열사가 자란 터전. 우리 민족사에 찬연한 광망(光芒)을 이루는 그 이름은 권오설(權五卨) 선생이다. 


1897년 11월 25일 여기 안동(安東) 땅인 풍서면 가곡리에서 출생(出生)하였다. 대구고등보통학교(大邱高等普通學校)와 서울 중앙학교(中央學校)에서 수학한 바 있다. 기미년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근무지 광주(光州)의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구금‧투옥당했으며 1920년 향리에 자리를 잡고 서민대중의 교육계몽에 힘씀과 아울러 농민운동, 청년운동, 노동운동에 두루 관계했다. 원흥학교(元興學校)를 설립 운영하고 풍산(豐山)소작인회, 안동(安東)청년회,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에 참여한 것이 그 뚜렷한 자취다. 이때부터 민족해방투쟁의 동지요 전우가 된 분들 중에는 같은 안동 출신 김재봉(金在鳳), 이준태(李準泰), 김남수(金南秀)와 이곳 가일마을의 혈족(血族)인 권오상(權五尙), 권오운(權五雲) 등도 있었다. 


1924년 국내와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서울에 상경, 화요회(火曜會)를 비롯해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 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 무산자동맹(無産者同盟) 등의 조직활동에 참여했으니 반제항일저항(反帝抗日抵抗)과 기아 빈궁에서 허덕이는 민중해방의 길이 그로써 이루어질 수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1925년 일제(日帝)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반제민중운동(反帝民衆運動)의 전위조직으로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을 발족시켰다. 1차 지하당(1次地下黨)이 일제(日帝)의 검거 선풍으로 붕괴되자 교묘한 잠행으로써 2차 지하당(2次地下黨)을 조직‧가동시켰다. 


1926년 거족적인 항일만세(抗日萬歲)를 기(期)한 6‧10만세운동(六十萬歲運動)에 임해서는 치밀한 거사계획을 세우고 선언문(宣言文), 태극기를 마련하는 등 빈틈없이 대사를 도모코자 했다. 그러나 이를 총독부 경찰이 탐지하는 바 되어 동지들과 함께 철창신세가 되었다. 일제(日帝)의 악법은 7년 구형에 5년의 실형을 선고했으나 감옥 속에서도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역사의 심판을 외쳐 마지않았다. 거듭된 악형에 1930년 4월 17일 일세(一世)의 애국지사(愛國志士)이며 절대의 민중운동자는 쇠창살 속에서 최후를 맞았다. 


느껴워라, 미친 회오리바람에 불굴(不屈)의 혁명투사(革命鬪士) 쓰러짐이여. 통탄스러워라, 칠흑의 어둠을 물리쳐 역사의 새벽을 열려한 겨레의 큰 전선(戰線) 무너짐이여. 이제 선생(先生)이 가신지는 70여년이 흘렀다. 살아생전 그토록 열망한 평등평화통일조국(平等平和統一祖國)의 꿈은 아직도 영마루 너머 구름인 채 우리 국토는 분단되어 있고 역사는 뒤틀려 비틀거린다. 이 부끄러운 시대를 사는 우리가 여기 돌을 세워 선생(先生)의 이름을 새김은 검수역산(劍樹力山) 무릅쓰고 조국(祖國)의 자유(自由)를 추구한 그 의기(意氣)가 너무나 절실하기 때문이며 민중‧민족을 위하여 물불도 가리지 않았던 그 사상(思想)과 정신(精神)이 진실로 사무치게 그리운 까닭인 따름이다.


서기 2001년 11월 11일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김용직(金容稷) 삼가 짓고

강원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황재국(黃在國) 삼가 쓰고

권오설선생기념비건립위원회(權五卨先生紀念碑建立委員會) 삼가 세우다

 

(참고) 이 비문을 지은 김용직 님은 비문에 언급된 김남수 선생의 아드님입니다.

안동 가일마을 (드론 촬영, 2015년)

권오설 88주기 89주기 추도식 자료 (경성트로이카프로젝트)

권오설 선생의 학창시절 교과서

권오설 선생 소장 잡지 

권오설 선생의 종교 관련 서적

권오설 선생 소장 기타 서적

피봉(皮封, 봉투의 겉면)과 간찰(簡札, 편지)

큰 동생 권오기(權五夔 )가 쓴 권오설 선생 약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