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활동

전남도청에 근무하던 권오설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여하였으며 그로 인해 일제 경찰에 체포, 구금되어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이때 이후 권오설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출소 후 고향에 돌아온 권오설이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계몽운동이었습니다. 우선 그는 청소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는 것에 뜻을 두고 1919년 11월 가일마을에 원흥학술강습소(원흥의숙)를 세워 교장 및 교사로 활동하였습니다. 


이듬해인 1920년부터 권오설은 계몽운동의 대상을 청년 및 농민으로 확장해 나갔습니다. 또한 활동 범위도 자신의 안동 권씨 가문 근거지인 가일마을을 넘어서 안동 전 지역으로 확대해 나갔습니다. 이를 확대하여 1920년에는 일직면에 일직서숙을 설립하여 청소년 교육운동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또한 안동청년회에 가입하여 집행위원으로 일하면서 일직면금주회를 창립하고 회장이 되었습니다. ‘금주회’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권오설은 사회의 변혁이란 일상의 삶을 개선하는 작은 실천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인식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권오설은 가곡농민조합을 조직하고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 결성에도 참여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식민 통치 하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고생하는 농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실천적 방법을 모색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시기에 안동 예안면 출신 김남수(金南洙, 1899~1945) 등과 교류하며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1922년에는 풍산학술강습회, 풍산청년회를 조직하였으며, 1923년에는 이준태(李準泰, 1892~1950), 김남수 등과 함께 풍산소작인회를 조직하여 집행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풍산소작인회는 소작농뿐 아니라 자작농, 중소 지주, 진보적 청년 지식인들이 참여함에 따라 회원 수가 5천여 명에 달하며 견고한 조직 체계를 갖춘 강력한 소작인단체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