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말부터 4년 남짓 안동에서 활발하게 활동해 오던 권오설은 1924년 초 활동 무대를 서울로 옮기게 됩니다.
상경 직후 권오설은 김재봉(金在鳳, 1891~1944), 김찬(金燦, 1894~?)과 연결되어 신사상연구회에 가입하고, 신흥청년동맹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으며, 무산자동맹회, 혁청단, 불꽃사(火花社) 등에 참여했습니다. 또한 비밀조직인 꼬르뷰로 국내부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 창설 시에는 풍산소작인회 대표 자격으로 참가하여 최고책임자에 해당하는 상무위원 10인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해 말 권오설은 남부지방을 순시하며 노동자·농민의 의식을 높임으로써 조직을 확대해 나가는 한편 서울에서는 인쇄직공조합, 철공조합 등 노동조합을 조직하였습니다.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이며 대동인쇄공장 직공, 경성전기회사 전차승무원, 고무직공, 양말직공, 양화(구두)직공 등의 파업과, 풍산 소작쟁의, 암태도 소작쟁의 등 전국 각지의 농민운동·노동운동을 지도 및 지원했습니다.

한편 1925년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이 정식으로 조선공산당을 창당하게 되는데, 권오설은 창당 준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됩니다. 2월에 김재봉, 김찬, 김단야(金丹冶, 1901~1938), 박헌영(朴憲永, 1900~1956) 등과 조선공산당 창당을 결의하였으며, 이와 맞물려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개최를 결의하였는데 이때 대회 준비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마침내 1925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책임비서 김재봉)이 창당되고, 다음날 18일 조선공산당의 청년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책임비서 박헌영)가 결성되었는데, 권오설은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 7인 중 1인으로 선출되었으며 조직부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조직부 책임자로서 권오설은 청년, 학생들의 규합에 노력하였고, 친동생인 권오직을 포함하여 총 21명의 유학생을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파견하는 등 차세대 지도자 양성에 힘을 쏟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