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만세운동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일명 신의주 사건)으로 조선공산당의 실체와 조직이 드러남에 따라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청의 책임비서 김재봉과 박헌영을 포함한 주요 간부 등 220명이 검거되었습니다. 


이때 고려공청의 중앙집행위원 중 유일하게 국내에 남아있던 권오설은, 일제 경찰이 조선공산당 관련자들을 검거하고자 눈에 불을 켜고 전국적으로 수색망을 확대하는 상황에서 피신자의 몸으로서  대담하게도 고려공산청년회의 재건에 착수했습니다. 그리하여 권오설은 고려공청 제2대 책임비서 및 조직책임자의 역할을 맡게 되었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1926년 2월경까지 고려공산청년회 조직을 어느 정도 복구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강달영(姜達永, 1887~1942)과 이준태를 중심으로 재건된 제2차 조선공산당 측과 만나 고려공청을 연결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권오설은 고려공청 책임비서인 만큼 당연직으로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을 겸임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일제 경찰의 체포를 피해 상하이(上海)로 피신한 조선공산당 주요 간부 김단야, 김찬, 조동호(趙東祜, 1892~1954), 조봉암(曺奉岩, 1899~1959)은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책임비서 김찬)를 조직하여 국내의 제2차 조선공산당(책임비서 강달영) 측과 연락을 취하며 지원책을 모색해 나갔습니다. 이때 권오설은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에서 들어오는 자금을 관리하고,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의 통신 연락 책임 및 경비 출납의 실권을 맡게 되었습니다.


제2차 조선공산당은 국내외 여건상 민족주의 계열과 연합하여 활동을 추진해 나가는 방침을 세웠으며, 대표적인 것이 민족통일전선체로서 ‘국민당’ 창당 계획이었습니다. 그것이 여의치 않자 권오설은 5월 1일 메이데이(May Day, 노동절) 연합 시위를 계획하였습니다. 그런데 4월 25일 순종(純宗)이 승하함에 따라 전국적인 애도의 분위기가 이어지게 되고 일제의 감시도 삼엄해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권오설은 5월 1일 중국의 안둥(현재 단둥)에서 김단야를 만나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에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을 변경하고 합의했습니다. 이에 따라 권오설은 국내에서 6·10투쟁 준비의 총책임을 맡았고, 김단야는 상하이로 돌아가 6·10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권오설은 시위를 전 민족적 운동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그 방법을 3·1운동 때와 마찬가지로 평화적 만세시위운동으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사회주의·민족주의·종교계·청년계·노동계·농민계의 혁명적 인사들을 망라한 통일전선체로서 '대한독립당' 조직을 구상하였습니다.


또한 대규모 검거로 당의 조직이 취약한 상황에서 투쟁에 따른 충격을 줄이기 위해 당과 분리하여 고려공청 간부 3인(권오설, 박민영, 이지탁)으로 구성된 별도의 6·10투쟁특별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권오설이 이끄는 특별위원회는 천도교 구파로 대표되는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연대하는 한편,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조선노농총동맹의 세력을 동원, 지도하며 시위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권오설 본인이 직접 격고문과 4종의 전단의 문구를 작성하였으며, 박래원(朴來源, 1902~1982)을 통해 인쇄와 배포를 준비시켰습니다. 한편, 임시상해부는 별도의 격문을 작성 인쇄하여 국내로 반입시키고, 6·10투쟁에 필요한 경비를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격고문과 전단


그러나 6월 4일 격문 한 장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6·10만세운동 관련자들이 하나 둘씩 체포되었고, 다른 격문들까지 모두 발각되어 압수당했습니다. 결국 6월 7일 권오설마저 체포됨으로써 6·10만세운동은 시도도 해보지 못하고 좌절될 위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