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7일 권오설이 체포된 날로부터 6월 10일 순종 인산일까지는 3일이 남아있었습니다. 일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관련자들을 색출해야만 했습니다. 제2의 3.1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권오설에게 끔찍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권오설에게 가혹한 고문을 한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제2차 조선공산당의 조직을 파악하여 검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권오설은 이러한 살인적인 고문을 받으면서도 3일 동안 결코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비록 계획과는 달리 소규모이지만 학생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권오설은 6.10만세운동 건과는 별개로 조선공산당 건으로 수사와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감 기간은 기약을 알 수 없이 계속 늘어났습니다. 1927년 2월에서야 비로소 예심이 종결되었고, 1927년 9월에 시작된 재판은 1928년 2월에서야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검사는 징역 7년 형을 구형하였고, 판사는 5년 형을 선고하였습니다. 그리고 1928년 11월 치안유지법 및 제령7호 위반 기결수에 대한 일체 감형 조치가 행해져 권오설은 1년 감형을 받았습니다.

고문 후유증으로 폐병, 위장병, 신경병 등을 앓던 권오설은 결국 1930년 4월 17일 출옥을 100여 일 남겨 둔 상황에서 서대문형무소 독방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일제는 권오설의 장례식이 그들에 대한 저항으로 번질까 두려워 사회장을 금지하고 가족장으로 치르게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입관도 불허했습니다. 시신마저도 나무관의 겉면을 함석판으로 두른 철제관 속에 가두고 봉분도 없는 평장으로 묻게 했습니다. 고문으로 학살당한 증거를 은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권오설은 33살의 젊은 나이에 불꽃같은 인생을 마감하고 고향 가일마을에 묻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