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활동

중앙고보에서 학업을 시작한 지 3년이 다 되어가던 무렵인 1924년 초, 그의 생애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안동에서 활동하던 친척 형 권오설이 서울로 올라온 것입니다. 권오설은 상경과 동시에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신사상연구회(화요회의 전신)에 가입하고, 신흥청년동맹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으며, 무산자동맹회, 혁청단, 불꽃사(火花社) 등에 참여했습니다.비밀조직인 꼬르뷰로 국내부에도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 창설 시에는 풍산소작인회 대표 자격으로 참가하여 최고책임자에 해당하는 상무위원 10인 중 1인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안동에 있을 때부터 큰 영향을 주었던 권오설이 이제 단지 일개 지역 활동가가 아니라 전국을 무대로 활동하는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변모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권오상은 이러한 권오설의 영향으로 1924년 중앙고보 4학년생으로서 신흥청년동맹 및 혁청단에 가입하여 활동하게 됩니다. 또한 1925년 권오설이 조선공산당 창당의 핵심 인물이자 고려공산청년회의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는 것과 맞물려 권오상은 1925년 9월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창립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러한 권오상의 활동이 한 단계 더 도약하는 계기가 생기는데,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조선공산당의 위기와 함께 찾아왔습니다.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일명 신의주 사건)으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청의 핵심 인사들이 대거 체포되거나 국외로 망명함에 따라 조직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이때 고려공청의 중앙집행위원 중 유일하게 국내에 남아있던 권오설은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 겸 고려공청 제2대 책임비서로 선출되었으며, 1925년 12월부터 1926년 1월경까지 조직을 복구하고 활동을 이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권오설은 신흥청년동맹과 혁청단 때부터 함께 활동해 오던 학생들을 중심으로 청년 조직을 충원하고 활성화시켜 나갔으며, 친척 동생인 권오상도 그중 한 명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 활동하게 됩니다.


우선 권오상은 1926년 1월경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였으며, 거의 같은 시기에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간부로 추가 선임되었습니다. 또한 1926년 3월에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당내 학생 야체이카의 구성원 5인(정달헌, 권오상, 이병립, 윤기현, 조두원) 중 1인으로서 고등보통학교, 전문학교, 대학교 등 각 학교 내부에 비밀 독서회를 조직하고 의식화하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이는 비밀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가 공개 학생 단체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물밑으로 후원, 지도함으로써 청년 조직을 확충하고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활성화하려는 권오설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권오상이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간부로 선출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인 1926년 2월에 조선인이 경영하는 유일한 도서관인 경성도서관이 경영난으로 인해 경성부(京城府)로 넘어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러자 조선학생과학연구회에서는 이를 민족 문화 상실의 위기로 파악하고 이에 반대하여 연설회 개최 및 전단 살포를 준비하는 등 경성도서관 유지 운동을 벌였습니다. 일제는 이러한 활동을 일체 금지하며 탄압했습니다. 이때 권오상은 유지 운동의 대표자 3인(권오상, 정달헌, 조두원) 중 1인으로 활동하였는데, 비공식적으로 사회 각 공공단체를 찾아다니며 도서관 유지의 필요성을 호소, 진정하고 이를 공론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렇듯 권오상은 차세대 사회주의운동 및 독립운동의 주역으로서 한 걸음씩 성장해 나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