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만세운동

권오상은 1926년 3월에 중앙고보를 졸업한 후 4월에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수물과(수학 및 물리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인 4월 25일에 순종(純宗)이 승하하였습니다. 그러자 조선공산당의 권오설과 임시상해부의 김단야는 5월 1일 비밀리에 만나 순종 인산일인 6월 10일에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로 합의하였고, 권오설은 6·10만세운동의 총책임자로서 고려공청 간부 3인으로 구성된 6·10투쟁지도특별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권오설이 이끄는 특별위원회는 천도교 구파로 대표되는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연대하는 한편,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조선노농총동맹의 세력을 동원, 지도하며 시위를 준비했습니다. 그 중에서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6월 10일 서울 시내에서 격문을 살포하고 가두 시위의 선봉에 나섬으로써 민중들의 시위 참여를 독려하기로 계획되었습니다.


이때 고려공청과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연결하는 역할은 바로 조선공산당원이자 고려공청원이자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간부로 활동하고 있는 당내 학생 야체이카 5인이 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5인 중 정달헌, 조두원, 윤기현은 5월 중에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기로 결정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실질적 핵심 역할은 남은 두 사람 권오상과 이병립이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5월 3일 권오설은 이병립을 통해 6·10만세운동과 관련된 당의 계획과 지침 및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임무와 역할을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5월 20일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각급 학교 학생 대표 4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투쟁 방법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협의했으며, 그에 따라 권오상은 연희전문학교 학생들을 포섭하며 시위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런데 6월 4일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격문 한 장이 일제 경찰에 발각됨에 따라 이를 집요하게 추궁하던 일제 경찰에 의해 천도교와 조선공산당 등 6·10만세운동 관련자들이 하나둘씩 체포되었고, 다른 격문들까지 모두 발각되어 압수당했습니다. 급기야 6월 7일에는 권오설마저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제2의 3·1운동이 기획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일제 경찰은 비상 경계령을 내려 닥치는 대로 불심 검문을 하고,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미만 보이면 수색과 체포를 하는 등 서울 시내는 극도로 삼엄한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  자칫 6·10만세운동은 시도도 해보지 못하고 좌초할 위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권오상을 비롯한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간부들은 일제의 눈을 피해 긴급히 격문과 태극기를 제작· 인쇄하였으며, 결국 6월 10일 순종의 상여가 지나가는 거리 곳곳에서 격문을 뿌리며 만세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오전 8시 40분경 상여가 청계천 관수교에 이르렀을 때 권오상은 이병립, 박하균 등 연희전문학교 학생 50여 명과 함께 준비했던 태극기를 흔들고, 격문을 뿌리며 만세를 외쳤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학생 40여 명이 체포되었지만 권오상은 체포를 피해 피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