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포와 사망

일제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유유히 빠져나온 권오상은 고향 안동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피신 생활은 그리 길지 못했습니다. 그 사이에 동지들이 체포되고 경찰의 포위망은 점점 좁혀왔습니다. 결국 수배령이 떨어진 지 50일이 지난 8월 1일 권오상은 안동경찰서 형사들에게 체포되었으며, 이튿날 서울의 종로경찰서로 압송되었습니다.


일제 경찰은 권오상에게 끔찍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그들이 권오상을 가혹하게 고문한 것은 6·10만세운동과는 별개로 조선공산당의 조직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권오상의 육체는 병들어 갔고, 폐병과 뇌병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임경석의 역사극장




1928년 2월 재판부는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권오상에게 징역 1년 형을 선고했습니다. 이후로도 권오상의 병세는 날로 심각해졌습니다. 목숨마저 위험해지자 일제는 5월 15일에 권오상을 병보석으로 내보냈고, 동지들은 그를 안국동에 유숙시켜 진료를 받게 했습니다. 그러나 병세가 이미 기울어 위급해지자 5월 19일 권오상은 병든 몸으로 안동 고향집에 돌아오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고향에 돌아온 지 보름 만인 6월 3일 권오상은 28살의 꽃다운 나이에 영원히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6·10만세운동 한 달 전인 1926년 5월에 아내 정차한과의 사이에서 낳은 외아들 권사혁(權師赫, 1926~1938)은 이제 겨우 두 살에 불과했습니다.




권오상의 묘소는 안동군 풍산면 수리(현 안동시 풍산읍 수리)에 조성되었으며,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습니다. 증언에 따르면 생가에서 묘소까지 약 9km의 길에 장례 행렬이 늘어섰는데, 그를 추모하는 만장(挽章)이 무려 1만여 개가 가득 들어찼다고 합니다. 중앙고보 출신에 연희전문학교 재학생이었던 만큼 서울에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학생들이 모두 내려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한 6월 8일에는 서울 수표정에 있는 조선교육협회에서 고학생 모임인 인광회(隣光會) 주최로 권오상의 추도식이 열렸습니다.